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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동백꽃

19. 동백꽃 당신은 당신은 봉오리 시절에도 피어날 때에도 활짝 피어난 다음에도 애절히 아름다웠지만 떨어져 누운 그 모습은 더욱 처연히 아름다웠습니다 세월에도 빛바램 하나없이 꼿꼿이 풍파에도 추하거나 처량하지 않고 단정히 단두의 최후에도 눈썹하나 까딱 않고 불타는 입술 벙긋이 수줍은 환희 머금은 채 그대로 남긴 자리조차 깔밋하게 그 마지막 모습이 숭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도 지금 동백꽃이고 싶습니다. ☆.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논산육군제2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대구 육군군의학교에서 의무기초과정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훈련 4준가 5 주가 끝난 일요일 외출,외박 나갔던 사람들이 그 ‘동백아가씨’를 안고 들어와 삽시간에 병영 안은 동백꽃 물결로 떠나 갈 듯하였습니다..

18. 아가야

18. 아가야 아가야 울지 마라 불편하냐 어디 아프냐 노회(老獪)로는 범접 못할 무구한 천진 아가야 깨어나라 새 세상 가자 구름 너머 별나라가 우리가 갈 곳 아가야 일어서라 먼 길 떠나자 모두 다 벗어놓고 신들메나 매고 아가야 같이 가자 손 잡고 가자 달빛과도 춤추며 노래 부르며 ☆. 예전에는 주위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참 많이 들으며 살았었다. 울음치고 슬프고 애처롭지 않은 게 없지만, 말못하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심장을 긁어대는 듯한 참으로 들어내기 어려운 소리였다. 뭐가 얼마나 불편하고 괴롭길래 저렇게 자지러지게 울까? 어른들도 살아내기 어려웠던 그 시절,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가야 얼마나 참아내기 힘 든 불편 불만이 많았을까? 그때엔 그 소리가 절박과 고통과 짜증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

17. 조각구름처럼이라도

17. 조각구름처럼이라도 순간 순간 하얗게 지워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 내가 가장이라는 것이 내가 선생님이었다는 것이 오늘이 오늘뿐이라는 것이 사람답게 후회없이 살자던 결심이 지난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깜빡 깜빡 까맣게 잊을 때가 있습니다 살아있음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이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다 놓아두고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게 남았다는 것을……. 순간 순간 깜빡 깜빡해 한심하고 서글프다가도 이 나이에 그나마 어딘가 이 육신 벗을 때까지는 조각구름처럼이라도 떠돌며 남아있어 주기만 하면……. ☆. ‘조각’이란 말이 ‘넝마’와 함께 나를 처연하게 하던 때가 있었다. 산산조각, 헝겊..

카테고리 없음 2021.12.22

16. 최선(最善)을 다하라

16. 최선(最善)을 다하라 펼쳐지는 순간 순간 하는 일 하나 하나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라 지나간 날들 아쉬워 말고 다가올 날 지레 걱정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하루가 가고 또 하루 일생은 하루 하루의 사슬 새로운 날마다 최선을 다하라 생각으로 말로만 아니라 겸허와 진심으로 실행하라 예단 말고 실천으로 최선을 다하라 삶은 보이기 위한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의 양심으로 최선을 다하라 잘하는 것보다 마지막 종이 울리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니라. ☆. 어디까지가 최선인가? 중학교 때였습니다. 공부를 꽤 열심히, 잘 하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언젠가 시험때였습니다. 옆자리의 친구 책 위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아침햇빛을 받은 선홍색 빛깔에 내 가슴이 ..

5. 강릉 이모우션(Emotion)

5. 강릉 이모우션(Emotion) 야들아 마카 일루와 쫄로리 서 봐 우리 어머이(꼭지이응'이')가 소꼴기 논고 준대 야이야 니들 퇴냈다 이 어신 때 소꼴기라니 해마두 단오날이믄 남대천 천방뚝에 아주머이가 지져내는 소두베이 감재적 울매나 맛이 좋은지 니따구들이 알겠나 우리 하르버이는 소낭그가 최고래요 소아리 소갈비에 소께이 뜨꺼지까지 앞 등강 보독솔밭도 솝복해서 좋대요 지누아리 장쩨이에 는제이 나물무침 농매갈 감재떡은 다 식어빠지는데 상거두 머하느라 못오나 애거 말러 죽겠네 자아거 따러댕기미 저닷하게 발광하우야 부세이 떨지말고 가마이 좀 못 있나 실공에 개눈까리 달라고 떼꾸렁 쓰는기래요 해목 가면 불가에선 불찜질에 조갑지 줍고 물에 들면 섭 째복에 해오이가 개락이지요 나릿가 재미시러운 일 우떠 다 말하우..

15. 저 소리 없는 소리를

15. 저 소리 없는 소리를 초봄 양지쪽 새싹의 고고 (呱呱) 소리 새벽이슬에 연꽃 입술 여는 소리 한낮 파도 위에 자지러지는 햇빛 웃음 소리 산골 저녁연기 속으로 걸어들어오는 커다란 함박눈의 발자국 소리 초원의 풀잎이슬로 내려앚는 한밤의 별빛 소리 그리고 광음 흘러가는 소리를 늙어가는 실향민의 한 쌓이는 소리 십자가 밑 소녀의 눈물 방울 흐르는 소리 홀로 사는 오막살이 노파의 주름지는 소리 산골짜기에 쓰러져 숨진 소년병의 마지막숨 소리 유월마다 달력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빛 절규의 소리 그리고 인간세상 굴러가는 소리를 ☆. 우리는 날마다 좋든 싫든 수많은 소리를 들으며 산다. 들리지 않았으면 좋을 소리가 들려 심성이 사나워지기도 하고, 들려줬으면 하는 소리가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아 서운하고 안타까울 ..

14. 무 제(無題)

14. 무 제(無題) 어제는 종일토록 툇마루 난간에 땀에 젖어 뒤척이다 날아온 박새 한 마리 고스란히 창 앞에 묻었었다 오늘은 빛나는 촉루(燭淚)에 매달려 흙먼지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다 넘어지다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가 된다 내 살아 있음에 내일은 밀린 일기를 쓰자 파도에 씻기우던 바위를 노래하자 저녁놀 아래 말없는 청산도 그리며…… ☆. 공들여 쌓아온 탑은 그새 모래성의 흔적으로만 남았는데, 삐끔한 문밖을 내다보니 안갯속이다. 웅크리고 앉아 어쩌지 도 못하는 이 무력함이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명상록』을 다시 펴 든다. 고교 시절 ‘페이터의 산문’을 배울 때는, 어려운 한자 낱말도 많고 절망뿐인 인생에 거부감도 있었고 납득되지 않는 말이 많아 두 번 다시 읽고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붙어있는 숨 ..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늘어가는 주름 하나 하나가 세월이 쓸고 지나간 자국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 주름 사이 사이마다 부끄럽던 실수나 실패의 검은 얼룩은 말고 고운 추억의 무늬들이 자리하게 하소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교훈이 되었던 아픈 기억들이 살덩이 속으로 묻히지 않게 하소서 희어진 성긴 머리카락이 세파에 시달린 초라한 흔적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 한 올 한 올을 바래게 한 고심과 고통의 날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 형형(炯炯)한 흰 빛으로 하여 닦아온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녹슬지 않게 하소서 멀어져가는 초점을 핑계로 세상의 불의와 비통을 못 본 체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돋보기 너머일망정 널리 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여전히 건승함을 증명하게 하소서 이 눈이 ..

12. 더라

12. 더라 바늘끝마음 하나 세울 자리 없네 고개를 드니 눈 밖은 끝없는 세상이더라 운명의 여신은 어디에 빌며 헤매었는데 여신은 마음속에 앉았더라 하늘로 목은 늘어나고 등허리 허전하다 바라고 기댈 곳은 나뿐이더라 내 땅은 산비탈 자갈밭 하늘만 쳐다보았네 비는 마음속 구름에 있더라 내다보니 내일 앞에 또 내일 발밑을 내려다보니 오늘이 절벽 끝에 섰더라 어디로 어디까지 가려는가 왜 가야 하는가 명이더라 ☆. M국민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한참 선배되는 한 분이 날마다 교무실 칠판에 유머나 격언 같은 걸 한 토막씩 쓰고는 해 설이나 농담 비슷한 토를 붙여놓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 ‘미’라고 쓰고는,‘나는 내 일생이 수우미양가(당시 학습 평가 5 단계) 중에 ‘미’만 되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때 내 얕은..

11. 홍콩 단상(斷想)

11. 홍콩 단상(斷想) 코발트빛 청화백자 접시 위에 버터로 구운 햄버거 하나 백 년을 다듬고 가꿔온 네온등 아름다운 남국의 정원 현란한 조명 아래 나이 찬 무희(舞姬)의 치맛자락 끝에 매달려 흔들리는 구슬 오월 초이레 곡마단 트럼펫 소리 뒤로 마지막 손님 부르는 저물녘의 단오터 (2002년 3월) ☆. ‘홍콩 간다’는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건 80년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황홀경에 빠진다’는 뜻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언 뜻 와닿지 않아 멍청했었다. 우리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89년 이전부터 홍콩은 속어(俗語)에 등장할 정도로 환상 적인 도시, 별천지의 대명사였다. 6.25 전쟁의 잿더미에서 끼니도 잇지 못해 허덕이던 때(1954)인데 ‘홍콩아가씨’란 유 행가가 대히트를 했을 정도니까. 그 말도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