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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황혼, 그 기막힌 순간을 지나며

28. 황혼, 그 기막힌 순간을 지나며 살기 위해 죽을 각오도 했다 그땐 꽃밭도 바다도 죽기살기로 악다구니 치던 진흙밭. 별도 없는 밤 길 빛이란 오직 내 마음의 노래 밀리고 차여도 서럽고 두려운 게 무엇이 있었으랴. 이제는 죽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때 홀로 걷는 허허한 벌판에 부를 노래가 없다 들어줄 누군들 있으랴. 노을 지고 땅거미 내리는데 어제가 아쉽고 오늘이 서럽고 내일이 적막하여 독백하는 황혼길의 방담(放談). ☆. 『황혼, 그 기막힌 순간을 지나며』의 머리글. 황혼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처절한 아름다움이다. 황혼이 아름다운 건 아주 짧은 순간의 황홀함 때문일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이 다 그렇듯. 꽃이 그렇고, 일출 일몰이 그렇고, 구름이 그렇고, 미인단명(美人短命)이 그렇고, 행복..

27. 人 間에서

27. 人 間에서 웃음도 사람 사이에 눈물도 사람 틈에서 난다 마음을 재우려거든 人 間을 끊고 산의 침묵을 들으려면 人 間을 떠나 세월을 보려거든 人 間을 버려야지 연을 끊고 훨훨 날아가는 연 미련은 미련함이니 희망을 품었다면 비록 지옥이 마중온단들 人 間에서 헤어져야지 ☆. 나는 차(茶)를 모른다. 차의 맛도 멋도 모른다. 새로 나는 찻잎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따서 그렇게 말리고 덖고 한 사람 의 정성이 담긴 제대로 된 차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차를 만났어도 여유와 한가로움으로 사 색을 마셔야 하는데,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그런 비트는 여유와 조는 한가로움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도 차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떤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

6. 예술아

6. 예술아 그 알몸으로 악다구니 속에서 어찌 피는가 ☆. 그 하고많은 자연물 중에 가장 속된 인간에게서 어찌 이런 것들이 탄생되는 걸까? 이 생명이 난잡한 인간사에 휘둘리지 않고, 늘 그 소리와 빛과 색채와 모습과 그 의미들 속에서 일렁일렁 흔들리고 느 꺼워하다가 스러질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26. 고향의 봄

26. 고향의 봄 야트막히 굴곡진 세월 담장 그 너머에 고향의봄을 심었다 쓸쓸한 그리움이 얼음판 갈라지듯 번질 때마다 마음 속에서 피어났다 떨어지곤 하던 남풍 불면 언제든 꽃망울 터트려줘 꽃잎 피듯 소름 돋던 장마에 볼기짝 씻고 햇살에 젖가슴 부풀어 오르면 고향의봄이 버르장이처럼 흥얼거려지던 오랜 세월 지난 뒤 봄이 저홀로 왔다 가고 임자없는 열매 마르더라도 저곳을 향해 영혼의 창을 열고 나의 살던 고향의봄이 그리워 그리워 ☆. 고향과 어머니 품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지요. 고향은 태어나 자라던 때의 추억이, 어머니 품은 안락하고 땨 뜻하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전쟁과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는 소용돌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 나야 했던 세대들이, 세계가 열리고 성공을 위해 스스..

16. 가는 길

16. 가는 길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이끌리듯 떠밀리듯 무작정 걷는 길 안갯속 빈 나루터에 배는 떠났고 얼마를 걷게 될지 알지도 못하면서 영원을 갈 것처럼 행전 쳤었지 고작해 칠팔십리길 굳은살이 시린데 ☆. 여행을 좋아했다. 그저 걷는 것도 좋았고, 자동차며 배며 비행기며 타는 것도 그저 좋았다. 적막하게 주저앉아 멍하니 공상을 헤매기보다 휘적휘적 새로운 사물들과 환경에 따라 상상이 반짝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진 걸까,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만사가 귀찮아 꼼짝하기 싫은 걸까? 다가올 다음 세상의 여행도 재미롭지 않을까? 심장 멈춘 육체가 땅속으로 스며드는 여행도 궁금하고, 영혼이 건넌다 는 강 여행도 흔들흔들 즐겁지 않니할까? 아무리 인생이 떠돌이라지만 이..

5. 홍련암에서

5. 홍련암에서 처얼썩 솨아 천년을 염불하는 파도의 기도 파랑새 부르는가 푸른 저녁 종소리 ☆. 바다는 내게 그리움이요 아픔이요 희망이었다. 그 바다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같은 자세로 있어주어 나는 안심할 수 있었고, 파도소리를 아파할 수 있었고, 그 너머를 동경할 수 있었다. 검푸르게 가없이 펼쳐진 바다! 바다를 좋아한다는 어느 제자가 언젠가 이런 글을 보내온 적이 있었다. ‘오래 보지 못했던 철 지난 고향 앞바다에 가 보았습니다. 여름철 내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 가까운 산속에서 지내고 돌아온 갈매기들, 어지러운 그림자를 피해 먼 바다로 밀려나갔던 착한 물고기들이 돌아와 있었고, 광란의 발길에 채여 상처투성이던 모래밭도 다독여주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다시 편안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바다는 읽을 수 없..

15. 毛道의 從心所欲

15. 毛道의 從心所欲 눈 귀 흐릿하고 기억은 아련하고 허리 굽고 기진하여 매사가 귀찮은데 스르르 꿈나라 여행가서 그냥 거기 살았으면 싹쓸바람 몰아쳐 세상 티끌은 쓸어가도 마음 속 여든 굴곡엔 켜켜이 쌓인 티끌 깨끗이 버리고 잊을 묘안인들 없을라나 ‘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라 했건만 장조(杖朝)가 되었어도 종잡을 수 없으니 차라리 所欲 버리고 귀잠이나 들었으면 毛道 : 『불교』 번뇌에 얽매여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범부(凡夫). 종심소욕(從心所欲) :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좇아서 함. ≪논어≫의 편에 나오는 말.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論語·爲政편에 나오는 말로, ‘70세에 뜻대로 행동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장조(杖朝) : 나이 여든 살을 이르는 말. 중국 주나라 때에, 여든 살이 되면 ..

4. 거미 왕국

4. 거미 왕국 날이 갈수록 촘촘해진 거미줄 날 곳은 어디 거미왕국 닮아서 두꺼워지는 법전 ☆. 따뜻하고 평온한 숲이 있었다. 그 숲에 독거미 몇 마리 생겨나 구역을 나누어 가지고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더니 날마 다 더 촘촘히 쳐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거미줄에 독나방은 걸리지 않고 여리고 힘없는 하루살이들만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 거미왕국 안 독나방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독나방은 그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묘책을 파악하고 있었든지, 아니면 거미줄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안에서만 활개를 치고 살아가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법전이 나날이 저렇게 두꺼워져 간다. 그런데도 세상은 요상하게도 점점 더 교활하게 꼬여가고, 독거미 새끼들만 활 개치고 나대는 건 무엇 때문일까? 석가나 예수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