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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마움

1976 강릉상고 3학년 제자들!이 두근거리고 흐뭇한 마음을 무슨 말로 나타내랴!1977년 2월에 손 흔들고 헤어진 후로도간단없이 연락하고 만나 왔지만이렇게 오래도록 끈끈히 이어지리라곤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그때 무슨 특별한 사연을 가졌었던 것도 아닌데... 돌아오는 택시 기사가우리들의 관계를 듣더니선생님 인품을 거론하기에 "사랑을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 아니겠나?" 우리는 내년 5월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개교 100주년의 사천(沙川)국민학교, 내 소년시절을 가다

1. 6·25 사변(事變) 전 강릉경찰서 사천지서와 사천소방서(2층 높이 망대도 있었음) 있던 자리 - 1950년 그해 지서 앞 토끼장에는 순경아저씨들이 사기막에 공비토벌 갔다가 잡았다는 호랑이 새끼 한마리가 있었는데,      주민들의 민원으로 곧 제자리에 놓아주었음.  2. 沙川面 德實里 61번지-  내 육신과 꿈이 자라던 집- 美老里 392번지에서 태어나 첫돌 전에 신축하여 이사온 집(논을 메워 이종대가 대목으로 지었다 함, 치료실과 진찰실을      갖춘 '昌德醫院'이었음). 결혼하여 3개월 동안 신혼살림을 끝으로 강릉시 교동(옛 사단 운동장 한쪽의 전셋방)으로 분가..- 지붕은 낡았으되 옛 그대로인데, 몸체는 대형 수술로 옛모습 찾을 수 없고, 없던 대문이 철창처럼 굳게 닫혀 있어 안을 들  ..

박정희 -경제대국을 꿈꾼 남자- 영화

그 넓은 홀에 관객은 나 하나! 박정희 대통령!하고싶은 말이 너무도 많은데 쓰려고 하니 쓸 수 없네. 1961.3.31.자 묵호국민학교 초임 발령. 그때 묵호는 밀수와 깡패의 소굴이었다. 그 한 달 반 뒤에 5.16. 군사혁명(그것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이 났다. 주동자 : 박정희 소장처음엔 심한 거부감을 느꼈으나, 날이 갈수록 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 대하여 존경을 넘어 위대함을 느꼈다.   1979.10.26. 일본파견교사 선발 시험에 합격한 24명은 해외파견연수중 선진지 시찰로 경주에 가 있었다.다음날 포항제철을 견학하도록 되어 있었고, 모두들 즐거움과 흥분으로 들떠 잠자리에 들었다.10.27. 새벽. 운동 나갔던 사람이 신문 든 손을 떨면서 사색이 되어 들어왔다.'박정희 대통령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