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시(詩) 42

39. 혼자 밥을 비비며

39. 혼자 밥을 비비며 시간이 다 돼가는데아무렇지도 않게혼자 앉아 밥을 비빈다 스스로 치열하게 살았다면서도돌아보면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고 속에선콩죽이 끓는데입다물고 얌전히 앉아아무 일 없는 듯 그리움은 저 홀로달아났다가는어느 틈에 돌아와 밥 알에 섞이고 뒤섞이는 밥 알 위로떨어져 내리는 뜻 모를 이건청승 때문인가  하루 이틀 사흘이 가도무엇 하나 어쩌지 못해 한심해도숟가락 놓지 못하고 혼자그저 밥을 비빈다

36. 제1회 ‘어르신 재치와 유머’ 투고 -한국시인협회-

백발(白髮) 달거리 이발 가는 길헝클어지는 파뿌리건사하기 귀찮은데밀어버릴까마주 오던 꼬마 배꼽에 손 모으더니 ‘안녕하세요?’ ‘너 참 착하구나!’ ‘할아버지, 하얀 머리 멋져요.’   하는 일 황혼의 적막을 깬다핸드폰 노랫소리보나마나하나 있는 국민학교 불알친구 ‘뭐하고 있어?’ ‘숨쉬기 운동’  이제는 흥얼흥얼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아니 아니지이제는사랑보다 더 귀한 건돋보기보청기

33. 세상

33. 세상 옛날은 중도 제 머리 못 갂던 세상 상투 튼 머리들이 굴러다니며 남의 땅 따먹기하던 그 세상 오늘은 나도 로켓에 걸터앉아 내손으로 내머리를 깎는 세상 혼자 내앞 가리는 이 세상 다음 저 세상은 ☆. 엊그제 엘자베스2세 여왕이 돌아가셨단다. 그 하늘같고 태양같고 영원할 것만 같던 큰 고목이 쓰러졌다는데 찔리는 가시 하나조차 없다. 새벽에 문밖을 나서니 집 앞 언덕의 후박나무잎 하나가 떨어져 구석에 박혀 있었다. 지난밤 바람도 없었고, 가을이 채 문턱을 넘어오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제명을 다하지도 못하고 비참히 처박혔을까? 시퍼런 커다란 잎이 가슴 위에 덮여와 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