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시(詩) 42

32. 맘에게

32. 맘에게 맘아! 짧지도 않은 한평생을 뒤엉켜 살아왔으면서 솔직히 너란 존재 의식도 없이 그저 그림자 쫓듯 고분고분 따랐었지 영원할 것 같던 길이 시나브로 거미가 먹물 번지듯 하기에 어렴풋이 종점이 멀잖다는 걸 거니채어 비로소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지 살아온 영욕의 흔적을 애써 무심한 척 하릴없이 흘러가고 있는 이 실체가 오부뎅이 네 공과(功過)였음을 깨닫고 왜 일찍부터 하량하지 못했을까. 시공 초월하여 구름처럼 나타났다 무소불위로 뒤엉켰다 바람처럼 사라지며 구메구메 꾀듯 협박하듯 몰아가는 네게 자석에 끌리듯 순종하기만 했었지 두드리는 북소리를 따라 춤을 추었고 가리키는 천 길 물속으로 들어가 바동바동 어느 날은 부지깽이 끝이었고 어느 날은 풍선이었지 이제 조물주는 온데간데 없는데 작품만 덩그러니 남아..

30. 기다리는 심정

30. 기다리는 심정 성난 파도에 뒤채이며 다가올 듯 오지 못하는 먼 바다 위 가물한 돛배 그림자 전선 이동 군사우편 한여름 폭우 속에 받았는데 눈 내려도 오지 않는 우체부 자전거 창호지 문구멍에 깜박이지도 않는 눈물 그렁한 아이의 눈망울 마당질하다 허리 들어 연신 사립문께 내다보는 산골 오두막 노파의 굽은 등 흔들리는 촛불 아래 홀로 앉은 식탁 위 맞은 편 가지런히 놓인 수젓가락 비 내리는 늦은 가을밤 아니 오고 인적은 끊어졌고 마지막 열차의 기적소리 벽시계가 열두점을 친다 화로의 잿불 위에 식어가는 된장 뚝배기 눈을 감는다. ☆. 새벽같이 눈 비비고 일어나 일터로 나가, 밤 늦게 들어와 발도 못 씻고 잠자리에 들던 시절에는 눈앞에 닥친 일에 묻 혀 외로움이든 기다림이든 비집고 들어앉을 자리가 없었다...

29.‘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29.‘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고맙습니다 출석했던 여러분 내가 안고 온 교직 인생의 끝자락을 마무르는데 멀리서 새벽 비행기까지 타고 달려와 준 여러분 고맙습니다 무엇이 무슨 힘이 그 먼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게 했으며 무엇이 무슨 힘이 그런 소탈하고 진지한 마음이 되게 했을까 생각해도, 생각해도 그건 각자 살아온 수레바퀴의 톱니에서 인연의 끈이 되었던 사제의 정이었겠지요 사제의 정! 나는 나, 가족, 시간, 미래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나름으로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귀한 시간 먼 길 달려온 기대만큼의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묻혀있던 작은 싹 하나라도 틔웠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행사를 치르고 난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한 과정의 담담함과 감사일 텐데 돌아보니 다하지 못..

28. 황혼, 그 기막힌 순간을 지나며

28. 황혼, 그 기막힌 순간을 지나며 살기 위해 죽을 각오도 했다 그땐 꽃밭도 바다도 죽기살기로 악다구니 치던 진흙밭. 별도 없는 밤 길 빛이란 오직 내 마음의 노래 밀리고 차여도 서럽고 두려운 게 무엇이 있었으랴. 이제는 죽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때 홀로 걷는 허허한 벌판에 부를 노래가 없다 들어줄 누군들 있으랴. 노을 지고 땅거미 내리는데 어제가 아쉽고 오늘이 서럽고 내일이 적막하여 독백하는 황혼길의 방담(放談). ☆. 『황혼, 그 기막힌 순간을 지나며』의 머리글. 황혼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처절한 아름다움이다. 황혼이 아름다운 건 아주 짧은 순간의 황홀함 때문일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이 다 그렇듯. 꽃이 그렇고, 일출 일몰이 그렇고, 구름이 그렇고, 미인단명(美人短命)이 그렇고, 행복..

27. 人 間에서

27. 人 間에서 웃음도 사람 사이에 눈물도 사람 틈에서 난다 마음을 재우려거든 人 間을 끊고 산의 침묵을 들으려면 人 間을 떠나 세월을 보려거든 人 間을 버려야지 연을 끊고 훨훨 날아가는 연 미련은 미련함이니 희망을 품었다면 비록 지옥이 마중온단들 人 間에서 헤어져야지 ☆. 나는 차(茶)를 모른다. 차의 맛도 멋도 모른다. 새로 나는 찻잎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따서 그렇게 말리고 덖고 한 사람 의 정성이 담긴 제대로 된 차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차를 만났어도 여유와 한가로움으로 사 색을 마셔야 하는데,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그런 비트는 여유와 조는 한가로움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도 차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떤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

26. 고향의 봄

26. 고향의 봄 야트막히 굴곡진 세월 담장 그 너머에 고향의봄을 심었다 쓸쓸한 그리움이 얼음판 갈라지듯 번질 때마다 마음 속에서 피어났다 떨어지곤 하던 남풍 불면 언제든 꽃망울 터트려줘 꽃잎 피듯 소름 돋던 장마에 볼기짝 씻고 햇살에 젖가슴 부풀어 오르면 고향의봄이 버르장이처럼 흥얼거려지던 오랜 세월 지난 뒤 봄이 저홀로 왔다 가고 임자없는 열매 마르더라도 저곳을 향해 영혼의 창을 열고 나의 살던 고향의봄이 그리워 그리워 ☆. 고향과 어머니 품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지요. 고향은 태어나 자라던 때의 추억이, 어머니 품은 안락하고 땨 뜻하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전쟁과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는 소용돌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 나야 했던 세대들이, 세계가 열리고 성공을 위해 스스..

25. 여운(餘韻)

25. 여운(餘韻) 등바닥 따스해오는 어렴풋한 새벽 아련한 꿈길 속으로 울려오던 어머니 도마질 소리의 아침이 쉬고있는 고즈넉한 터에 물에 잠긴 몸에 파문을 그려오던 성당 종소리의 맹꽁이 울어대던 보릿고개 늦저녁 고단한 삶을 다독여주던 건넛마을 다듬잇소리의 전봇대 신음하던 섣달그믐 밤 늦도록 홀로 적막을 달래주던 늙으신 아버지 기침소리의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울림. ☆. 기억에서도 지워져가는 오래 전의 소리들이지만 어느 순간 문득 여운이 되살아나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다시는 들 을 수 없는 것들이기에 더욱 간절해지는 것 같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힘들었던 날들이었지만 가슴을 울리고 따뜻한 정 이 스미는 이런 소리들이 있었기에 살아가는 용기와 힘이 살아났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아쉽고 공허한 것은..

24. 자문(自問)

24. 자문(自問) 빼꼼히 벌어진 세상 문 틈으로 누군가에게 물어본 것 같다 내 배당금 얼만가요 대답이 없었다 정수리를 내밀며 또 물었다 내 모가치는 어디 있나요 네 능력만큼이다 숨을 몰아쉬며 그러면 능력을 주세요 그건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기르는 것이다 문밖을 나섰다 잘살게 해 주나요 한참만에 망석중이 되려느냐 아무도 너를 어쩔 수 없고 너 또한 망석중이를 원치 않으리니 남에게 묻지 말고 너에게 물어보라 이승문을 나설 때 나에게 물어봐야겠다 잘 살았느냐고 ☆. 밖은 올 겨울 들어 최강 한파라는데 남으로 난 창 안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자리끼가 얼 정도로 외풍이 심했던 집에 서, 입는 것도 변변치 못하여 화로를 끼고 살던 옛날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며 목화솜 같은 안도가 한가롭게 감싸안는 다. 코로..

23. 그곳, 좋겠다

23. 그곳, 좋겠다 人 間이 아니라도 좋겠다 볏모 안으려 알몸 찰람한 5월의 무논 옥토가 아니어도 좋겠다 풀머리 어우러져 춤추는 유유한 풀벌 천국이 아니어도 좋겠다 잔물결이 목새와 종일토록 사분거리는 모래톱 그곳이라도 좋겠다 돈 행복이 없는 곳 그곳이라면 좋겠다 創初의 自然 그대로의 곳 純然한 곳이라면 그냥 좋겠다 마른 세월의 강에 윤회의 물레방아 멈춘 그곳. ☆. 그 맑던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려올 듯하던 별들도 창을 닫습니다. 하늘은 온통 물바다가 된 듯하고, 이땅도 기후 재난으로 인간이 더 도망칠 곳이 없어집니다. 인간이란 동물이 이땅에 생겨나 겨우 몇 백만 년 동안에 이 아름다 운 땅을 온통 분탕질하고 남은 것들을 인류문화유산이라고 지정해 놓고 자랑질하고 있는데, 이 상처투성이의 회복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