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시(詩) 42

22.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22.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말 없는 몰두의 몸짓 뜨거운 마음이 시선이 오직 하나뿐인 무념의 세계가 남 탓 지다위 않는 스스로의 믿음이 자만 않고 겸손에서 비롯한 옹골찬 책임감이 일심에 단심(丹心)이 밴 뜨거운 땀방울이 희망 감동과 함께 하고 만족이 성애되는 까닭입니다. ☆. 흙 한 점 있을 것 같지 않은 바위 틈새에 싹을 틔운 잡초를 봅니다. 한여름 길바닥에 홀로 열심히 더듬질하고 있는 개 미를 봅니다. 이들은 극한의 환경에서도 자신의 생명에 온 힘을 다합니다. 한편으로 애처롭기도 하지만 그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아름답게 느껴져 생명의 숭고함을 느낍니다. 사람도 서툰 욕심 없이 열심히, 그래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늘 행복과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어쩌다 ..

21. 나머지공부

21. 나머지공부 짝꿍마저 돌아간 널따란 교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턱을 괴고 앉아 책 속의 옛 얘기도 선생님의 내일 말씀도 도무지 뵈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내 생각엔 뒤떨어진 것도 더 배울 것도 없는데 아르르 왜 나만 남겨놓은 것일까 날은 어둡고 눈발은 날리고 데리러 오는 사람도, 가도 좋다는 말씀도 없어 핑그르르 그만 눈물이 돈다 앙상히 식어가는 가슴을 붙잡고 어두운 골목에 서서 어어이, 야들아 불러도 대답없는 술래가 되고만다. ☆. 옛날 국민학교에 나머지공부라는 게 있었다. 학력이 뒤쳐져 수업시간에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학습 지진아(遲進兒) 라고 부르며 방과 후에 따로 남겨 공부시키는 것이었는데, 한글이나 사칙을 깨치지 못한 아이들이 주 대상이었다. 삶 의 형편도 교육환경도 열악했던 때였으니 지진아들이..

20. 말도 없이

20. 말도 없이 말도 없이 아침이 왔다가 저녁이 갑니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제 홀로 왔다가는 걸 무심히 맞고 보냅니다 말도 없이 새 날이 오고 새 달이 갑니다 나며 들며 그네처럼 흔들리다 속절없이 달력만 넘깁니다 말도 없이 봄이 왔다 겨울이 갑니다 꽃을 맞았는데 낙엽을 보냅니다 싸락눈이 설움처럼 문풍지를 때립니다 말도 없이 청춘이 왔다 한생이 갑니다 막이 엊그제 열려 절정이 언제였던가 모르는데 종막을 알리는 징이 웁니다 지나 온 외길이 그림자로 밟힙니다 귓가에 고고(呱呱)가 쟁쟁한데 안녕 인사말이 객쩍어 바람자듯 가뭇없이 가야겠지요. ☆. 국민학교 운동회 때 내가 제일 싫어한 것이 달리기였다. 보나마나 언제나 내가 꼴찌였으니까.(아, 언젠가 한 번 꼴찌 에서 2등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이 도중에 넘어..

19. 동백꽃

19. 동백꽃 당신은 당신은 봉오리 시절에도 피어날 때에도 활짝 피어난 다음에도 애절히 아름다웠지만 떨어져 누운 그 모습은 더욱 처연히 아름다웠습니다 세월에도 빛바램 하나없이 꼿꼿이 풍파에도 추하거나 처량하지 않고 단정히 단두의 최후에도 눈썹하나 까딱 않고 불타는 입술 벙긋이 수줍은 환희 머금은 채 그대로 남긴 자리조차 깔밋하게 그 마지막 모습이 숭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도 지금 동백꽃이고 싶습니다. ☆.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논산육군제2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대구 육군군의학교에서 의무기초과정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훈련 4준가 5 주가 끝난 일요일 외출,외박 나갔던 사람들이 그 ‘동백아가씨’를 안고 들어와 삽시간에 병영 안은 동백꽃 물결로 떠나 갈 듯하였습니다..

18. 아가야

18. 아가야 아가야 울지 마라 불편하냐 어디 아프냐 노회(老獪)로는 범접 못할 무구한 천진 아가야 깨어나라 새 세상 가자 구름 너머 별나라가 우리가 갈 곳 아가야 일어서라 먼 길 떠나자 모두 다 벗어놓고 신들메나 매고 아가야 같이 가자 손 잡고 가자 달빛과도 춤추며 노래 부르며 ☆. 예전에는 주위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참 많이 들으며 살았었다. 울음치고 슬프고 애처롭지 않은 게 없지만, 말못하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심장을 긁어대는 듯한 참으로 들어내기 어려운 소리였다. 뭐가 얼마나 불편하고 괴롭길래 저렇게 자지러지게 울까? 어른들도 살아내기 어려웠던 그 시절,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가야 얼마나 참아내기 힘 든 불편 불만이 많았을까? 그때엔 그 소리가 절박과 고통과 짜증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

16. 최선(最善)을 다하라

16. 최선(最善)을 다하라 펼쳐지는 순간 순간 하는 일 하나 하나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라 지나간 날들 아쉬워 말고 다가올 날 지레 걱정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하루가 가고 또 하루 일생은 하루 하루의 사슬 새로운 날마다 최선을 다하라 생각으로 말로만 아니라 겸허와 진심으로 실행하라 예단 말고 실천으로 최선을 다하라 삶은 보이기 위한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의 양심으로 최선을 다하라 잘하는 것보다 마지막 종이 울리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니라. ☆. 어디까지가 최선인가? 중학교 때였습니다. 공부를 꽤 열심히, 잘 하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언젠가 시험때였습니다. 옆자리의 친구 책 위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아침햇빛을 받은 선홍색 빛깔에 내 가슴이 ..

15. 저 소리 없는 소리를

15. 저 소리 없는 소리를 초봄 양지쪽 새싹의 고고 (呱呱) 소리 새벽이슬에 연꽃 입술 여는 소리 한낮 파도 위에 자지러지는 햇빛 웃음 소리 산골 저녁연기 속으로 걸어들어오는 커다란 함박눈의 발자국 소리 초원의 풀잎이슬로 내려앚는 한밤의 별빛 소리 그리고 광음 흘러가는 소리를 늙어가는 실향민의 한 쌓이는 소리 십자가 밑 소녀의 눈물 방울 흐르는 소리 홀로 사는 오막살이 노파의 주름지는 소리 산골짜기에 쓰러져 숨진 소년병의 마지막숨 소리 유월마다 달력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빛 절규의 소리 그리고 인간세상 굴러가는 소리를 ☆. 우리는 날마다 좋든 싫든 수많은 소리를 들으며 산다. 들리지 않았으면 좋을 소리가 들려 심성이 사나워지기도 하고, 들려줬으면 하는 소리가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아 서운하고 안타까울 ..

14. 무 제(無題)

14. 무 제(無題) 어제는 종일토록 툇마루 난간에 땀에 젖어 뒤척이다 날아온 박새 한 마리 고스란히 창 앞에 묻었었다 오늘은 빛나는 촉루(燭淚)에 매달려 흙먼지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다 넘어지다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가 된다 내 살아 있음에 내일은 밀린 일기를 쓰자 파도에 씻기우던 바위를 노래하자 저녁놀 아래 말없는 청산도 그리며…… ☆. 공들여 쌓아온 탑은 그새 모래성의 흔적으로만 남았는데, 삐끔한 문밖을 내다보니 안갯속이다. 웅크리고 앉아 어쩌지 도 못하는 이 무력함이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명상록』을 다시 펴 든다. 고교 시절 ‘페이터의 산문’을 배울 때는, 어려운 한자 낱말도 많고 절망뿐인 인생에 거부감도 있었고 납득되지 않는 말이 많아 두 번 다시 읽고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붙어있는 숨 ..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늘어가는 주름 하나 하나가 세월이 쓸고 지나간 자국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 주름 사이 사이마다 부끄럽던 실수나 실패의 검은 얼룩은 말고 고운 추억의 무늬들이 자리하게 하소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교훈이 되었던 아픈 기억들이 살덩이 속으로 묻히지 않게 하소서 희어진 성긴 머리카락이 세파에 시달린 초라한 흔적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 한 올 한 올을 바래게 한 고심과 고통의 날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 형형(炯炯)한 흰 빛으로 하여 닦아온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녹슬지 않게 하소서 멀어져가는 초점을 핑계로 세상의 불의와 비통을 못 본 체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돋보기 너머일망정 널리 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여전히 건승함을 증명하게 하소서 이 눈이 ..

12. 더라

12. 더라 바늘끝마음 하나 세울 자리 없네 고개를 드니 눈 밖은 끝없는 세상이더라 운명의 여신은 어디에 빌며 헤매었는데 여신은 마음속에 앉았더라 하늘로 목은 늘어나고 등허리 허전하다 바라고 기댈 곳은 나뿐이더라 내 땅은 산비탈 자갈밭 하늘만 쳐다보았네 비는 마음속 구름에 있더라 내다보니 내일 앞에 또 내일 발밑을 내려다보니 오늘이 절벽 끝에 섰더라 어디로 어디까지 가려는가 왜 가야 하는가 명이더라 ☆. M국민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한참 선배되는 한 분이 날마다 교무실 칠판에 유머나 격언 같은 걸 한 토막씩 쓰고는 해 설이나 농담 비슷한 토를 붙여놓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 ‘미’라고 쓰고는,‘나는 내 일생이 수우미양가(당시 학습 평가 5 단계) 중에 ‘미’만 되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때 내 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