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더라
바늘끝마음 하나 세울 자리 없네
고개를 드니
눈 밖은 끝없는 세상이더라
운명의 여신은 어디에
빌며 헤매었는데
여신은 마음속에 앉았더라
하늘로 목은 늘어나고
등허리 허전하다
바라고 기댈 곳은 나뿐이더라
내 땅은 산비탈 자갈밭
하늘만 쳐다보았네
비는 마음속 구름에 있더라
내다보니 내일 앞에 또 내일
발밑을 내려다보니
오늘이 절벽 끝에 섰더라
어디로 어디까지 가려는가
왜 가야 하는가
명이더라
☆. M국민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한참 선배되는 한 분이 날마다 교무실 칠판에 유머나 격언 같은 걸 한 토막씩 쓰고는 해
설이나 농담 비슷한 토를 붙여놓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 ‘미’라고 쓰고는,‘나는 내 일생이 수우미양가(당시 학습 평가 5
단계) 중에 ‘미’만 되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때 내 얕은 지혜와 인생 경험으로는 그 깊은 뜻에 이를 정도가 못되었
던 것, 지금에서야 그 선배의 얼굴이 또렷이 스쳐갈 때가 있다.
가끔 지나온 날들이 필름 되어 돌아간다. 잘했던 일은 스르르 돌아가고, 못했던 일들이 톱니에 걸려 자꾸 덜커덕거린
다. ‘이러 저러한 땐 참 어리석었구나. 왜 그런 바보 같은 판단과 결정을 했을까? 이건 이랬으면 좋았겠고, 저건 저랬더
라면 ‘미’ 이상은 되어 이렇게 덜커덕거리지는 않을 텐데……. 그때 어리고 미욱한 나를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톡톡 건드
려 주기만이라도 했더라면…….' 눈이 조금 트인 지금 보니 지혜를 열어주는 선인, 선배들의 책도 세상에 차고 넘쳤는데
그런 것을 접할 기회도 없었으니……, 아! 어쩌면 그런 찬스가 옆을 스쳤는데 내가 잡지 못하고 놓쳐버린지도 모를 일.
잘못 타고난 시대를 탓해 본 적도 있었다. 한창 자라는 나이에 6.25가 터져 주변에 널린 건 전쟁쓰레기요, 손 끝에 잡
히는 거라곤 찢긴 포탄껍데기와 흩어진 총알 뿐이었으니, 나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 인생의 최대의 구원(仇怨)은 김일
성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남아 있는 여정(旅程)이라도 더 이상은 어리석지 말아야겠기에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활자를 훑어도 나오는 건 한숨
일 밖에.
'최길시 시집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 무 제(無題) (0) | 2021.12.19 |
---|---|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0) | 2021.12.18 |
11. 홍콩 단상(斷想) (0) | 2021.12.17 |
10. 가을 그날에 (0) | 2021.12.15 |
9. 당신은 누구십니까 (0) | 2021.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