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시(詩)

14. 무 제(無題)

최길시 2021. 12. 19. 10:48

14. 무 제(無題)

 

어제는

종일토록 툇마루 난간에

땀에 젖어 뒤척이다

날아온 박새 한 마리

고스란히 창 앞에 묻었었다

 

오늘은

빛나는 촉루(燭淚)에 매달려

흙먼지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다 넘어지다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가 된다

내 살아 있음에

 

내일은

밀린 일기를 쓰자

파도에 씻기우던

바위를 노래하자

저녁놀 아래

말없는 청산도 그리며……

 

 

 

 

 

 

 

. 공들여 쌓아온 탑은 그새 모래성의 흔적으로만 남았는데, 삐끔한 문밖을 내다보니 안갯속이다. 웅크리고 앉아 어쩌지

   도 못하는 이 무력함이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명상록을 다시 펴 든다. 고교 시절 페이터의 산문을 배울 때는, 어려운 한자 낱말도

   많고 절망뿐인 인생에 거부감도 있었고 납득되지 않는 말이 많아 두 번 다시 읽고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붙어있는 숨

   이 길어질수록 그 한 구절 한 구절이 되살아나와 폐부를 찌르며 달려든다. 1,800여 년 전, 상상도 닿지않는 아득한 그

   옛날, 대 로마제국의 황제, 그것도 현제(賢帝)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던, 인간이 가지고싶고 누리고싶은 모든 것을 향유

   했을 거라고 생각되는 황제께서, 인간의 허망한 삶에 대해 하나 하나 신랄하게 짚어낸 것에 감탄과 존경을 금할 수 없

   다.

 

    내 딴에는 열심히 휘젓고 파헤치고 닦으며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색바랜 종이 몇 장과 머리속에

   떠돌아다니는 몇 조각의 기억 뿐……. 휑한 허허벌판에 마른 바람이 인다. 삶이 그렇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어렴풋이

   나마 느끼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면서도, 지금와 문득 사기를 당한 것 같은 허망한 생각이 든다. 얼마 남아있지 않은

   앞날도 뭐 그렇게 덧없으리라는 건 불문가지(不問可知). 만물의 영장이라고 어깨 펴고 으스대봐도 어쩔 수 없는 자연

   의 일부이고 보면 당연한 일인 것을.

 

    남은 시간을 어떻게 곱씹으며 살아야 하나? 문을 나서며 뒤돌아보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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