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시(詩)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최길시 2021. 12. 18. 17:49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늘어가는 주름 하나 하나가

세월이 쓸고 지나간 자국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 주름 사이 사이마다

부끄럽던 실수나 실패의 검은 얼룩은 말고

고운 추억의 무늬들이 자리하게 하소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교훈이 되었던 아픈 기억들이 살덩이 속으로 묻히지 않게 하소서

 

희어진 성긴 머리카락이

세파에 시달린 초라한 흔적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 한 올 한 올을 바래게 한

고심과 고통의 날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 형형(炯炯)한 흰 빛으로 하여 닦아온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녹슬지 않게 하소서

 

멀어져가는 초점을 핑계로

세상의 불의와 비통을 못 본 체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돋보기 너머일망정

널리 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여전히 건승함을 증명하게 하소서

이 눈이 감기는 날까지 눈빛으로 하여 주위에 우려와 애련(哀憐)을 끼치지 않게 하소서

 

작은 소리는 들리지 않더라도

바른 소리는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이순(耳順)이라고는 하나

염화미소(拈華微笑)를 듣지 못합니다

소리 없는 소리의 의미를 듣게 하소서

잠드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와 산사의 목탁소리가 귓가에 맴돌게 하소서

 

깜박깜박하는 기억력이

나이 탓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하소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기억들 가운데서

나의 불찰로 생긴 증오의 기억들은 말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사랑은 기억하게 하소서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그리운 얼굴들을 언제든 생생히 떠올릴 수 있게 하소서

 

여전히 쉼없이 뒤척이는 마음이

욕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하소서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 하더라도

심술부리는 아이같은, 치매 들린 늙은이같은

울화와 억지와 편벽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마음의 창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나 몰래 보내지는 하얀 사랑조차도 절절히 깨닫게 하소서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갑니다

풍화(風化)로 거칠어가는 표면에 푸른 이끼가 새 생명을 붙이고 자라가는 바위처럼

이 육신 구석구석마다에 여린 새 생명들이 깃들게 하소서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 자랄 때, 빨리 나이들어 얼른 어른이 되고싶었다. 학교 일찍 들어간 탓에 늘 작고 어리다고 놀림받고 무시당하는 게

   싫기도 했지만, 어른이 되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이대로 먹어야 한다는 동지 팥죽 새알

   심도 억지로 한두 개씩 더 먹기도 했다. 젊을 때도 팽팽하고 날렵한 젊음보다 배도 좀 나오고 옆머리가 희끗~한 사람

   들이 부러웠다. 중후해 보이고 싶었다. (그 때문이었던지 머리가 너무 빨리 희어져 30대 끝무렵부터 염색을 하지 않으

   면 안되었다)

 

    천의 실올이 낡아가다 보풀이 되어 날아가듯이, 사람도 그렇게 낡아가다가 명이 다하는 거라고 믿었다. 어렸을 때 이

   웃 노인들을 보아도, 후에 부모님이 늙어가시는 것을 가까이서 보았어도, 노환으로 눕기 전에는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

   살이 지고 동작이 느려진다는 것 외에 특별히 어려워하시는 것은 없어 보였고, 별다른 말씀도 없으셨기에 그렇게 믿었

   었다. 그냥 모든 걸 손놓고 아무 생각없이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다.

 

    이제는 한 살 한 살 더 나이 들어가는 것이 힘겹다. 늙어간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늙는 일이 힘들다는 말

   을 들어본 적이 없고 글에서도 읽은 적이 없었는데……. 비로소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노()가 왜 사고(四苦)에 드는지

   를 뒤늦게 절감하고 있다. 생활이 풍족해져 의식주에 큰 불편 없고, 의술과 복지지원체계가 발달한 지금에도 노쇠해가

   는 육체적 아픔과 고도(孤島)로 밀려나는 정신적 슬픔을 드러내기가 난감한데, 하루하루의 삶이 곤고(困苦)했던 옛 그

   시절에 늙어가는 고통을 호소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의 박탈감에서 오는 허전함과 고독감에 병마에까지

   시달려야 하는 것이 예전이라고 달랐겠는가? 호소하고 싶은 말이 목줄을 타고 올라와 목구멍을 막아 숨찼겠지만, 생명

   의 원죄(原罪) 같은 노고(老苦)가 몇 마디 위로의 말이나 인력(人力)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그저 눈 감고 입 닫고

   사셨던 것이리라.

 

    사람이 나서 자라고 늙고 죽는 일을 만들어 놓은 신()인들 어쩌겠는가! ·의학이 발달하여 생명을 다소 연장하고

   육체적 고통을 얼마간 줄일 수야 있겠지만……. 사문(死門)을 향하여 한 걸음씩 다가가면서 내가 진심으로 소망하는 것

   은, 추하지 않게, 정말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나이 들다가 의젓하고 품위있게 세상문을 나서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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