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저 소리 없는 소리를
초봄 양지쪽 새싹의 고고 (呱呱) 소리
새벽이슬에 연꽃 입술 여는 소리
한낮 파도 위에 자지러지는 햇빛 웃음 소리
산골 저녁연기 속으로 걸어들어오는 커다란 함박눈의 발자국 소리
초원의 풀잎이슬로 내려앚는 한밤의 별빛 소리
그리고
광음 흘러가는 소리를
늙어가는 실향민의 한 쌓이는 소리
십자가 밑 소녀의 눈물 방울 흐르는 소리
홀로 사는 오막살이 노파의 주름지는 소리
산골짜기에 쓰러져 숨진 소년병의 마지막숨 소리
유월마다 달력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빛 절규의 소리
그리고
인간세상 굴러가는 소리를
☆. 우리는 날마다 좋든 싫든 수많은 소리를 들으며 산다. 들리지 않았으면 좋을 소리가 들려 심성이 사나워지기도 하고,
들려줬으면 하는 소리가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아 서운하고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우리 귀가
너무 큰 소리, 너무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은 천만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진정한 마음을 모으고 모아 간절히 기도하면 특별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고, 그러면
평소에는 들을 수 없던 저런 소리들을 갖난아기 숨결소리처럼이라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도록 했더라면, 인간이 자연
적 천성 그대로의 아름다운 심성을 살려가 이 세상이 한결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나이 탓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좀 나앉아 무심히 살라는 신의(神意)로도 느껴져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당장 생활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시대가 발달하여 잘 만들어진 고가의 보청
기가 나오긴 했지만, 아무리 어쩌고 해도 부모에게서 받은 귀만은 당최 못하다. 인간의 잔손 끝으로 만들어내는 요령
이 어찌 신의 영역을 넘볼 수 있으랴!
'최길시 시집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 아가야 (0) | 2021.12.25 |
---|---|
16. 최선(最善)을 다하라 (2) | 2021.12.22 |
14. 무 제(無題) (0) | 2021.12.19 |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0) | 2021.12.18 |
12. 더라 (0) | 2021.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