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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22.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말 없는 몰두의 몸짓 뜨거운 마음이 시선이 오직 하나뿐인 무념의 세계가 남 탓 지다위 않는 스스로의 믿음이 자만 않고 겸손에서 비롯한 옹골찬 책임감이 일심에 단심(丹心)이 밴 뜨거운 땀방울이 희망 감동과 함께 하고 만족이 성애되는 까닭입니다. ☆. 흙 한 점 있을 것 같지 않은 바위 틈새에 싹을 틔운 잡초를 봅니다. 한여름 길바닥에 홀로 열심히 더듬질하고 있는 개 미를 봅니다. 이들은 극한의 환경에서도 자신의 생명에 온 힘을 다합니다. 한편으로 애처롭기도 하지만 그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아름답게 느껴져 생명의 숭고함을 느낍니다. 사람도 서툰 욕심 없이 열심히, 그래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늘 행복과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어쩌다 ..

9. 싸리비

9. 싸리비 법고소리에 눈비비고 댓돌로 나선다 태초의 신비런가 산사의 새벽 뜰 싸리비 스쳐간 공덕에 이슬비 스며들다 시절 얼룩에 너저분한 낙서들 어수선한 내 한뉘 뜰 쓸어줄 비 없는가 싸리비 보이지 않고 땅거미는 내리고 ☆. 70년대, 도시 큰 학교와 시골의 작은 학교가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하며 선물도 주고 받았는데,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서 학생들 모금으로 학용품, 운동 도구 같은 것을 사 보내면, 시골 자매학교에서는 학무모들이 싸리비를 매어 한 차씩 답장을 보내왔다. 그 싸리비는 일 년 내 학교 운동장과 교사 구석구석을 깨끗이하는 데 절대적이었다. 한 해가 지나면 싸리비는 거의 닳아 몽당비가 되고, 또 새 싸리비가 연례처럼 배달되었다. 늦가을이 되면 집집마다 한겨울 동안 난방으로 쓸 화목을 장만하였는..

8. 미명

8. 미명 파도가 되리라는 미명(美名)을 앞세우고 한평생 미명(微明)을 더듬고 헤쳤어도 여태껏 한 치 앞 모르는 내일도 미명(未明) 이름이 좋아야 입신양명 한다기에 개명을 할까 말까 어름대다 말았었지 미명(美名)에 명운 걸었더면 내 뜻대로 됐을까. ☆. 이 세상 모든 물체에는 이름이 붙어있다. 언제 누군가에 의하여 처음 붙여진 이름이겠는데, 어떤 지명(地名)은 역사나 현상에 정말 기막히게 잘 들어맞는 것 같아 감복할 때가 있다. 세상만사를 경영하는 사람의 이름은 더없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며 성명학(姓名學)도 생겨났고, 본 이름 외에 아명이니, 자니, 호니 하 는 걸 만들어 본 이름을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예부터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들은 유명 작명가를 찾아다니기도 ..

7. 노심(老心)

7. 노심(老心) 가슴이 뜨끔해도 갈 때가 되었는가 허리가 시큰해도 맘 먹으란 신호인가 창밖의 마지막 한 잎에 매달리는 이 마음 쌓았다가 허물고 칠한 위에 또 개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색 변하는 이 마음 마지막 부칠 편지는 여전히 백지인데 젊은 날엔 몰랐었지 그 바람이 춘풍인 줄 길 가다 스친 소매 그것이 인연인 걸 눈 뜨고 같이 늙어가는 어리석은 이 마음 발길 없는 겨울 호수 갈댓잎만 버석인다 스산히 펼쳐진 허허로운 수면엔 짝 잃은 기러기 한 마리 마음처럼 떠있고. ☆. 근심 걱정 슬픔 불만 궁금함 즐거움 기쁨 그리움 소망 기대 …… 이 모든 것들이 이 나이에도 여전히 제멋대로 들락날 락한다. 가만보니 내가 붙잡고 실랑이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마는 것 같다. 풀씨 하나 땅에 떨어져 싹 틔워 바..

2. 가을 나비

2. 가을 나비 꽃잔치인가 허겁지겁 갔더니 단풍나무 숲 한탄한들 어쩌랴 잘못 타고난 것을. ☆. 늦가을 볕이 쬐는 빨간 단풍나무잎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것도 같았고, 허기에 지쳐 주저앉은 듯한 그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와 보였다. 답답하고 하릴없어 TV를 켜면, 안타까운 장면들이 마음에 돌팔매질을 한다. 중남미 좌파정권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 여 아이들 손을 잡고 정든 고국을 떠나 살 곳을 찾아 길게 늘어선 이민행렬, 아프리카 후진국의 영양실조된 아이들의 형상. …….. 저들, 나와 똑 같은 저 사람들. 영문도 모르는, 스스로 어쩔 힘도 없는 저 아이들은 전생에 무슨 죄인가?

21. 나머지공부

21. 나머지공부 짝꿍마저 돌아간 널따란 교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턱을 괴고 앉아 책 속의 옛 얘기도 선생님의 내일 말씀도 도무지 뵈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내 생각엔 뒤떨어진 것도 더 배울 것도 없는데 아르르 왜 나만 남겨놓은 것일까 날은 어둡고 눈발은 날리고 데리러 오는 사람도, 가도 좋다는 말씀도 없어 핑그르르 그만 눈물이 돈다 앙상히 식어가는 가슴을 붙잡고 어두운 골목에 서서 어어이, 야들아 불러도 대답없는 술래가 되고만다. ☆. 옛날 국민학교에 나머지공부라는 게 있었다. 학력이 뒤쳐져 수업시간에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학습 지진아(遲進兒) 라고 부르며 방과 후에 따로 남겨 공부시키는 것이었는데, 한글이나 사칙을 깨치지 못한 아이들이 주 대상이었다. 삶 의 형편도 교육환경도 열악했던 때였으니 지진아들이..

6. 티눈 하나

6. 티눈 하나 인생사 무사무고란 야무진 희망일 뿐 천재지변만 저어하랴 믿던 도끼 발등 찍고 발바닥 티눈 하나에 일상이 절뚝이네 봄볕이 좋다 하나 바람이 시새우고 물거울 같은 내마음에 무심한 돌 날아드네 무심코 흘린 말씨 하나 목에 걸려 대롱대롱 평화로운 초원에 하이에나 설쳐대고 맑은 강물 흐리는 건 미꾸라지 한 마리 만물의 영장 세상이라고 예외는 아니로세. ☆. 하루 하루 배 채우는 일도 어렵던 어린 시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사는 줄 알았었다. 한참 후에 선진국 사람들은 발달된 문명의 혜택을 흠뻑 받고 큰 불편함 없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 리는 왜 이렇게 사는가, 언제 우리도 저렇게 잘 살 수 있을까 부러워하고 잘못된 나라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지금..

20. 말도 없이

20. 말도 없이 말도 없이 아침이 왔다가 저녁이 갑니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제 홀로 왔다가는 걸 무심히 맞고 보냅니다 말도 없이 새 날이 오고 새 달이 갑니다 나며 들며 그네처럼 흔들리다 속절없이 달력만 넘깁니다 말도 없이 봄이 왔다 겨울이 갑니다 꽃을 맞았는데 낙엽을 보냅니다 싸락눈이 설움처럼 문풍지를 때립니다 말도 없이 청춘이 왔다 한생이 갑니다 막이 엊그제 열려 절정이 언제였던가 모르는데 종막을 알리는 징이 웁니다 지나 온 외길이 그림자로 밟힙니다 귓가에 고고(呱呱)가 쟁쟁한데 안녕 인사말이 객쩍어 바람자듯 가뭇없이 가야겠지요. ☆. 국민학교 운동회 때 내가 제일 싫어한 것이 달리기였다. 보나마나 언제나 내가 꼴찌였으니까.(아, 언젠가 한 번 꼴찌 에서 2등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이 도중에 넘어..

19. 동백꽃

19. 동백꽃 당신은 당신은 봉오리 시절에도 피어날 때에도 활짝 피어난 다음에도 애절히 아름다웠지만 떨어져 누운 그 모습은 더욱 처연히 아름다웠습니다 세월에도 빛바램 하나없이 꼿꼿이 풍파에도 추하거나 처량하지 않고 단정히 단두의 최후에도 눈썹하나 까딱 않고 불타는 입술 벙긋이 수줍은 환희 머금은 채 그대로 남긴 자리조차 깔밋하게 그 마지막 모습이 숭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도 지금 동백꽃이고 싶습니다. ☆.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논산육군제2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대구 육군군의학교에서 의무기초과정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훈련 4준가 5 주가 끝난 일요일 외출,외박 나갔던 사람들이 그 ‘동백아가씨’를 안고 들어와 삽시간에 병영 안은 동백꽃 물결로 떠나 갈 듯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