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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조각구름처럼이라도

최길시 2021. 12. 22. 18:01

17. 조각구름처럼이라도

 

순간 순간

하얗게 지워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

내가 가장이라는 것이

내가 선생님이었다는 것이

오늘이 오늘뿐이라는 것이

사람답게 후회없이 살자던 결심이

지난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깜빡 깜빡

까맣게 잊을 때가 있습니다

살아있음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이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다 놓아두고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게 남았다는 것을…….

 

순간 순간 깜빡 깜빡해

한심하고 서글프다가도

이 나이에 그나마 어딘가

이 육신 벗을 때까지는

조각구름처럼이라도 떠돌며 남아있어 주기만 하면…….

 

 

 

 

 

 

. ‘조각이란 말이 넝마와 함께 나를 처연하게 하던 때가 있었다. 산산조각, 헝겊조각, 쪼가리, 사금파리 같은 말들이 연

   상되기도 하고, 5·60년대 넝마주이들이 입었다기보다 걸치고 있던 조각 조각의 누더기, 졸음을 무릅쓰고 밝지도 않은

   등잔불 앞에서 끄덕이며 밤 늦게까지 식구들의 양말이며 옷을 깁던 어머니 무릎 위 쓰레기 수준의 천 조각들, 논산 훈

   련소에서 구멍난 훈련복 무릎과 팔꿈치에 덧대던 떨어진 헌옷 자락들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하늘을 제대로 쳐다본 것도 정말 오래 전 일이었다. 사춘기 무렵 풀밭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때가 가끔

   있었다. 그 너그럽고 빨려들어갈 것 같은 푸름과 한가로이 둥둥 떠다니는 구름이 부러웠었는데, 오랫동안 하늘 쳐다보

   는 걸 잊고 살았었다. 요즘 때때로 창가에 앉아 무료히 허공을 바라보는 일이 있다. 예전보다는 왠지 빛바랜 듯한 조각

   구름,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다 모이고, 모였다 흩어져선 아예 흔적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날이 갈수록 지난 일들의 기억이 흐려진다. 어느 순간, 그때 그 기억 조각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불현듯 떠올려지지 않

   아 안타까워하다가, 어느 구석에선가 언뜻 나타나 주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한숨이 나올 때가 다 있다.

   해어져 쓸모없이 된 옷에 정성들여 덧대 기워진 천 조각처럼 소중하고 대견스럽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