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 81

12. 더라

12. 더라 바늘끝마음 하나 세울 자리 없네 고개를 드니 눈 밖은 끝없는 세상이더라 운명의 여신은 어디에 빌며 헤매었는데 여신은 마음속에 앉았더라 하늘로 목은 늘어나고 등허리 허전하다 바라고 기댈 곳은 나뿐이더라 내 땅은 산비탈 자갈밭 하늘만 쳐다보았네 비는 마음속 구름에 있더라 내다보니 내일 앞에 또 내일 발밑을 내려다보니 오늘이 절벽 끝에 섰더라 어디로 어디까지 가려는가 왜 가야 하는가 명이더라 ☆. M국민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한참 선배되는 한 분이 날마다 교무실 칠판에 유머나 격언 같은 걸 한 토막씩 쓰고는 해 설이나 농담 비슷한 토를 붙여놓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 ‘미’라고 쓰고는,‘나는 내 일생이 수우미양가(당시 학습 평가 5 단계) 중에 ‘미’만 되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때 내 얕은..

11. 홍콩 단상(斷想)

11. 홍콩 단상(斷想) 코발트빛 청화백자 접시 위에 버터로 구운 햄버거 하나 백 년을 다듬고 가꿔온 네온등 아름다운 남국의 정원 현란한 조명 아래 나이 찬 무희(舞姬)의 치맛자락 끝에 매달려 흔들리는 구슬 오월 초이레 곡마단 트럼펫 소리 뒤로 마지막 손님 부르는 저물녘의 단오터 (2002년 3월) ☆. ‘홍콩 간다’는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건 80년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황홀경에 빠진다’는 뜻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언 뜻 와닿지 않아 멍청했었다. 우리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89년 이전부터 홍콩은 속어(俗語)에 등장할 정도로 환상 적인 도시, 별천지의 대명사였다. 6.25 전쟁의 잿더미에서 끼니도 잇지 못해 허덕이던 때(1954)인데 ‘홍콩아가씨’란 유 행가가 대히트를 했을 정도니까. 그 말도 이제..

4. 노우(老友)

4. 노우(老友) ‘이 몸살 떨어지면 봄 산행 같이 가자’ 그 기별 기다리며 귀뚜리와 지새운다 떠난다 한 마디 말도 없이 혼자 먼 길 떠났는가 『샘터』 2013년 12월호에 실림 ☆. 동네에 전화가 없던 나의 어린 시절(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어떻게 생긴 건지 본 적도 없었던), 원방의 소식은 편지로, 급한 일은 전보로, 다급한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 전해 왔다. 그때는 편지 한 장도 그렇게 반갑고 귀할 수가 없었다. 설면한 관계의 소식들은 시간이 지나 소문으로 바람에 실려왔다. 그래서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지들은 무소식이 곧 희소식이라 했다. 지구 반대편 먼 외국에 있는 사람과도 시시콜콜히 수다떨며 살아가는 요즈음의 일상으로 보면, 옛날에 답답해 어떻게 살았을까 하지만, 대화 못해 우울증 걸렸다는 사람..

10. 가을 그날에

10. 가을 그날에 가을 그날엔 예닐곱 소년이고 싶다 하늘도 날아보고 새털구름에도 앉아보는 세상 밖 소년이고 싶다 가을 그날엔 혼자이고 싶다 하늘도 땅도 다 잊고 가을볕 아래 알몸으로 갈바람에 가슴속 풀어헤치고 싶다 가을 그날엔 임종 앞둔 도공(陶工)이고 싶다 한뉘 이루지 못한 그 하나 돌아가는 물레 앞에 흙 한덩이 잡고 앉아 세월의 잿무덤 위 마지막 불꽃에 기도하고 싶다 가을 그날엔 한 줄기 바람이고 싶다 근원 모르는 그리움 좇아 하얀 길 따라 무작정 빈 마음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다. ☆. 세계 최빈국이었던 5,60년대, 의식주 해결과 질병에 하루 살이가 힘겨워 그나마 외국의 구호물자에 목숨을 매달고 살 아야 했던 그 시절. 보릿고개로 대변되던 봄은 어른들에겐 힘든 계절이었겠지만 철없는 우리들에겐 화창..

9. 당신은 누구십니까

9. 당신은 누구십니까 보리밭 그 너머 아지랑이 따라 천방지망 나풀대던 나비 앞에 아련한 한 줄기 향기 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살에 휩쓸리고 바위에 부서지고 칠흑같은 어둠속 절체의 그 순간에 깜박인 등댓불 하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갈대꽃 날리는 벼랑 끝 언저리 나날이 사그라지는 잿불 불씨에 애타게 부채질하던 당신은 누구십니까 섣달그믐 자정이 머지않은 이 시간 홀연히 팔 벌리고 나타날 것만 같은 당신은 기약없는 당신은 정녕 누구십니까 ☆. 살아가면서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지 않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 크기와 빈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누 구를 막론하고 방황하고, 갈등하고, 좌절을 겪는 때가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삶의 경쟁에서 나앉아 해질 때를 기다 리며 넋놓고 있다고 해서 생명에 부딪혀오는 바람..

3. 박물관에서

3. 박물관에서 누천년 전 그 미소가 어제인 듯 생생하여 고작 칠십 지나온 내 자취 돌아본다 처마 끝 풍령 자락에 바람이 스친다. 저와 나 사이의 세월은 간 곳 없고 느껴올 숨결을 유리가 막아섰다 눈감고 내 숨도 멈춰라 천 년을 덮을세라 시공(時空)도 덧없고 목숨도 속절없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창밖엔 햇빛이 눈부신데 그림자가 흔들린다 ☆. 가끔 박물관에 가 옛 그 시대의 풍정에 빠져보기도 하고, 주말마다 TV쇼 진품명품을 넋을 놓고 꿈속인 듯 즐긴다. 이 런 행동은 나의 어떤 역사 의식에서라기보다 인간의 뿌리에 대한 원천적 동경에 대한 무의식적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마음이 개운하고 시원해진다기보다 오히려 묵직한 무엇, 인간의 역사에 대한 신비와 의문 ..

8. 무념

8. 무념 바닷가 바위 끝 암자 하나 담장 너머 능소화 두어 송이 열린 법당 안 빙긋 웃음짓는 부처님 실눈 한밤 달은 밝은데 댓닢 스치는 한 줄기 바람소리 ☆. 버스는 남도(南道)의 시골 자락을 구불구불 휘돌아 간다. 그 자락마다 드문드문 인적 끊긴 집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고 독(孤獨)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 있다. 흔들거리는 내 몸도 시골길이 된다. 숲 속 돌다리 건너 계단을 오른 언덕 위에 작은 암자가 있다. 속세의 먼지를 떨쳐버리듯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선다. 시간이 멈춘 듯한 한여름의 산사(山寺)는 한적하고 고즈넉하다. 잠시나마 미혹(迷惑)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문 열린 법당에는 석조미륵불 하나만 오롯이 가부좌를 하고 있다. 들판을 달린다. 목적지도 없는 듯 그저 달려간다. 간간이 창..

7.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멥니다

7.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멥니다 인큐베이터 영아병동 전쟁고아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 이민 행렬 이산가족 불귀(不歸)의 국군포로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 길가 벤치의 무의탁 노인 빛바랜 무명용사 비 부모 찾는 해외입양아의 편지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 늦가을 밤비 첼로의 솔베이지 노래 단오장 곡마단의 트럼펫 소리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꼬깃꼬깃 접은 10원짜리 한 장 땡볕 비탈밭 노파의 등허리 빛바랜 사진 아래 나뒹구는 망자의 유품 아……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 가슴에 맺혀 오래도록 남는 한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인간관계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피해가 큰 자연재 해도 개개인이 겪은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면 모두에게 그리 오래 남아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2019년 12..

6. 옛날얘기

6. 옛날얘기 바느질하는 엄마 곁에 화로를 안고 앉아 옛날얘기를 조릅니다 무릎을 흔들며 실끝을 당기며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호렝이 담배 먹던 시절 깊은 산 속 어느 마을에 호랑이가 바람을 몰고오나 봅니다 싸락눈이 문풍지를 때립니다 바깥문이 덜컹거립니다 콩닥콩닥 가슴이 뜁니다 꼬부랑 할멍이가 살았대 ‘에이, 또 그 얘기’ 하면서도 침을 꼴깍 삼킵니다 엄마 곁으로 바짝 다가앉습니다 어느 날 꼬부랑 할멍이가 꼬부랑 지팽이를 짚고 꼬부랑 길을 가는데 굽은 허리춤에서 나오던 하얀 곶감과 헝클어진 흰머리의 외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솔바람 소리 무섭던 외갓집 오솔길 소름이 돋습니다 꼬부랑 똥이 매렵더래 꼬부랑 낭게 올라가 꼬부랑 똥을 누는데 꼬부랑 개가 와 꼬부랑 똥을 먹더래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쥐었던 주먹이 펴..

5. 개 망 초

5. 개 망 초 가녀린 몸매에 하얀 모시적삼이 애처로운 가슴앓이하는 여인 산 설고 물 선 먼 이국땅에 날려와 바람에 불리는 대로 아무데나 주저앉아 이름도 고작 ‘개-’를 붙여 받았을 뿐 뿌리박고 정들면 고향이라고 열이레 달빛 아래에 선 창백한 이방의 여인 ☆. 개망초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뼈마디 앙상한 자그마하고 하얗던 그 여인의 손! 1962년인가 3년이었을 것입니다. 가을이 그야말로 절정에 닿아 내리막을 내려다보고 있던 때. 근무하던 M국민학교 에서 10월초 연휴에 교직원 소풍을 설악산으로 갔습니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이었지요. 비포장도로에 흔 들리는 몸보다 마음은 더 들떠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새내기 몇은 일행을 뒤로하고 먼저 가을 숲을 헤치며 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