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 81

26. 고향의 봄

26. 고향의 봄 야트막히 굴곡진 세월 담장 그 너머에 고향의봄을 심었다 쓸쓸한 그리움이 얼음판 갈라지듯 번질 때마다 마음 속에서 피어났다 떨어지곤 하던 남풍 불면 언제든 꽃망울 터트려줘 꽃잎 피듯 소름 돋던 장마에 볼기짝 씻고 햇살에 젖가슴 부풀어 오르면 고향의봄이 버르장이처럼 흥얼거려지던 오랜 세월 지난 뒤 봄이 저홀로 왔다 가고 임자없는 열매 마르더라도 저곳을 향해 영혼의 창을 열고 나의 살던 고향의봄이 그리워 그리워 ☆. 고향과 어머니 품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지요. 고향은 태어나 자라던 때의 추억이, 어머니 품은 안락하고 땨 뜻하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전쟁과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는 소용돌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 나야 했던 세대들이, 세계가 열리고 성공을 위해 스스..

16. 가는 길

16. 가는 길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이끌리듯 떠밀리듯 무작정 걷는 길 안갯속 빈 나루터에 배는 떠났고 얼마를 걷게 될지 알지도 못하면서 영원을 갈 것처럼 행전 쳤었지 고작해 칠팔십리길 굳은살이 시린데 ☆. 여행을 좋아했다. 그저 걷는 것도 좋았고, 자동차며 배며 비행기며 타는 것도 그저 좋았다. 적막하게 주저앉아 멍하니 공상을 헤매기보다 휘적휘적 새로운 사물들과 환경에 따라 상상이 반짝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진 걸까,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만사가 귀찮아 꼼짝하기 싫은 걸까? 다가올 다음 세상의 여행도 재미롭지 않을까? 심장 멈춘 육체가 땅속으로 스며드는 여행도 궁금하고, 영혼이 건넌다 는 강 여행도 흔들흔들 즐겁지 않니할까? 아무리 인생이 떠돌이라지만 이..

5. 홍련암에서

5. 홍련암에서 처얼썩 솨아 천년을 염불하는 파도의 기도 파랑새 부르는가 푸른 저녁 종소리 ☆. 바다는 내게 그리움이요 아픔이요 희망이었다. 그 바다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같은 자세로 있어주어 나는 안심할 수 있었고, 파도소리를 아파할 수 있었고, 그 너머를 동경할 수 있었다. 검푸르게 가없이 펼쳐진 바다! 바다를 좋아한다는 어느 제자가 언젠가 이런 글을 보내온 적이 있었다. ‘오래 보지 못했던 철 지난 고향 앞바다에 가 보았습니다. 여름철 내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 가까운 산속에서 지내고 돌아온 갈매기들, 어지러운 그림자를 피해 먼 바다로 밀려나갔던 착한 물고기들이 돌아와 있었고, 광란의 발길에 채여 상처투성이던 모래밭도 다독여주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다시 편안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바다는 읽을 수 없..

15. 毛道의 從心所欲

15. 毛道의 從心所欲 눈 귀 흐릿하고 기억은 아련하고 허리 굽고 기진하여 매사가 귀찮은데 스르르 꿈나라 여행가서 그냥 거기 살았으면 싹쓸바람 몰아쳐 세상 티끌은 쓸어가도 마음 속 여든 굴곡엔 켜켜이 쌓인 티끌 깨끗이 버리고 잊을 묘안인들 없을라나 ‘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라 했건만 장조(杖朝)가 되었어도 종잡을 수 없으니 차라리 所欲 버리고 귀잠이나 들었으면 毛道 : 『불교』 번뇌에 얽매여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범부(凡夫). 종심소욕(從心所欲) :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좇아서 함. ≪논어≫의 편에 나오는 말.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論語·爲政편에 나오는 말로, ‘70세에 뜻대로 행동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장조(杖朝) : 나이 여든 살을 이르는 말. 중국 주나라 때에, 여든 살이 되면 ..

4. 거미 왕국

4. 거미 왕국 날이 갈수록 촘촘해진 거미줄 날 곳은 어디 거미왕국 닮아서 두꺼워지는 법전 ☆. 따뜻하고 평온한 숲이 있었다. 그 숲에 독거미 몇 마리 생겨나 구역을 나누어 가지고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더니 날마 다 더 촘촘히 쳐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거미줄에 독나방은 걸리지 않고 여리고 힘없는 하루살이들만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 거미왕국 안 독나방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독나방은 그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묘책을 파악하고 있었든지, 아니면 거미줄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안에서만 활개를 치고 살아가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법전이 나날이 저렇게 두꺼워져 간다. 그런데도 세상은 요상하게도 점점 더 교활하게 꼬여가고, 독거미 새끼들만 활 개치고 나대는 건 무엇 때문일까? 석가나 예수 같..

3. 거기 누구 있소

3. 거기 누구 있소 마음에 대고 거기에 누구 있소 소릴질렀지 끌탕하던 속내가 금세 조용해졌네. ☆. 마음 한쪽에서 햇살이 비치는가 싶더니 황홀한 상상과 벅찬 즐거움에 빠져들다가, 어디선지 돌연 검은 점 하나 나타 나더니 온통 속이 뒤틀리며 원망과 저주의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내 마음인데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니 어쩌랴! 그걸 내 뜻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면 여태 이런 사람이 아니겠지? 강아지의 마음을 읽어내어 훈련시키는 조련사의 능력도 대단하거니와 조련사의 뜻에 빗나감이 없이 순순히 따라주 는 강아지가 순진하여 귀엽기만하다. 사람들의 마음도 본디는 그렇게 순수하고 순진했을 것이다. 인간의 문명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마음도 다양 해져 변화난측해지지 않..

14. 산수(傘壽)에 걸터앉아

14. 산수(傘壽)에 걸터앉아 협로 뚫고 나오느라 죽을 힘 다했겠고 고하(苦河) 헤치느라 사생결단해 왔는데 출거도 이수(二竪)에 시달리리 산수(傘壽)는 어드멘가 어떻게 살아왔나 돌아보니 자취 없고 어디로 가고 있나 내다봐도 오리무중 고희면 종심이라더니 산수 끝 풍경만 흔들리고 더 이상 갈 곳도 가얄 곳도 없는데 바람 부는 대로 그냥저냥 살자 하나 팔십 년 한숨 쉬어 봐도 사는 의미 모르겠네 ☆. 유아원 꼬마들이 선생님 손을 잡고 고물고물 천연스레 지나간다. 뜬금없이 가슴 한쪽이 찌릿해지며, 오만가지 옛일들 이 머릿속을 떼지어 덮어온다. 나의 70여년 전 그 시절과 저 아이들의 70년 후를 생각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인생은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시대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는데, 시대의 물결은 지도자라는 ..

13. 일구지난설

13. 일구지난설 어렸을 적 어머니 말씀 ‘사는 게 일구지난설이다' 뜻 몰라 의아해도 물어보지 못했었지 고래희 살아보고 나니 이제사 알 듯하네 인간사 신비란 건 나고 죽는 순간뿐 살아오며 외줄 위 춤 어찌 다 말로 하랴 역사는 쳇바퀴 돈다지만 일상은 일구지난설 생각하는 갈대라며 이런 생각 저런 수작 영장(靈長)이라 으스대며 간교하기 그지없지 마음은 뜬구름 같고 짓거리는 일구지난설 일 좀 밀리면 바빠서 죽겠다고 일 좀 없으면 살기 힘들어 죽겠다고 사람 삶 짐승과 다르랴 사는 게 일구지난설 고의적삼에 짚신 신고 허위허위 붉은 언덕 뭍에선 불개미 떼 물에선 거머리 떼 발자취 뒤돌아보니 과거사 일구지난설 속끓이고 시치미 떼고 살아가니 망정이지 경전 배워 양심대로 살 수 없는 인간 세상 사는 게 일구지난설이란 원..

12. 만년(晩年) 영춘(迎春)

12. 만년(晩年) 영춘(迎春) 종다리 울음소리 하늘 위로 날아도 고희 넘은 광음은 노곤해 귀찮은가 봄볕이 아양떨어도 펴지지 않는 굽은 잔등 밥상 위 달래 냉이 봄바람이 일렁이고 쑥잎 씹는 잇사이에 봄 내음이 끼여도 마음속 고드랫돌은 닥쳐올 일에 매달렸고 부슬부슬 봄비에 그리움이 젖는데 뻐꾸기가 추억 깨워 사진첩을 뒤적인다 봄밤을 잠 못 드는 건 다정인가 노심인가 ☆. 봄이 청춘을 꼬득였던가, 청춘이 봄을 안달했던가? 해마다 봄이 오면 두근거리고 하늘을 날던 마음도, 여든 번이나 반 복되다보니 지겹고 시들해졌나보다. 옛날 아버지들은 겨우내 사랑방에서 발이나 자리를 매거나 노를 꼬셨다. 밤 늦도록 달그락거리던 고드랫돌 소리가 멈 추는가 싶으면 곧 봄이 오고 있었다. 어제가 입춘이라는데 앞산자락에 덮여 있는..

11. 코로나

11. 코로나 인간의 오만방자에 미물이 대로했나 광관(光冠)이란 미명붙여 달래보려 하였어도 아뿔싸 위대한 영장 일상이 속절없이 무너지네 힘도 형체도 없는 것이 세상을 뒤엎었네 불똥은 인간 속에 숨어 천지사방 튀는데 불낸 놈 뒤돌아앉아 콧구멍만 후비고 하늘에 누가 있어 굽어보면 가관일레 나라 따라 수령(首領) 따라 우왕좌왕 천태만상 인지(人智)가 우주 나른대도 섭리를 넘을쏜가 ※ 코로나=광관(光冠), 햇무리, 달무리 ☆. 이게 무슨 난린가 싶다. 오래 살다보니 별 난리를 다 겪어본다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보면 잘 숨죽이고 살던 바이러스 를 인간이 벌집 쑤시듯이 들쑤셔 이 분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살아있는 사람도 참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로 인 해 생명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은 지하에서 얼마나 분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