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 81

30. 기다리는 심정

30. 기다리는 심정 성난 파도에 뒤채이며 다가올 듯 오지 못하는 먼 바다 위 가물한 돛배 그림자 전선 이동 군사우편 한여름 폭우 속에 받았는데 눈 내려도 오지 않는 우체부 자전거 창호지 문구멍에 깜박이지도 않는 눈물 그렁한 아이의 눈망울 마당질하다 허리 들어 연신 사립문께 내다보는 산골 오두막 노파의 굽은 등 흔들리는 촛불 아래 홀로 앉은 식탁 위 맞은 편 가지런히 놓인 수젓가락 비 내리는 늦은 가을밤 아니 오고 인적은 끊어졌고 마지막 열차의 기적소리 벽시계가 열두점을 친다 화로의 잿불 위에 식어가는 된장 뚝배기 눈을 감는다. ☆. 새벽같이 눈 비비고 일어나 일터로 나가, 밤 늦게 들어와 발도 못 씻고 잠자리에 들던 시절에는 눈앞에 닥친 일에 묻 혀 외로움이든 기다림이든 비집고 들어앉을 자리가 없었다...

18. 명(命)

18. 명(命) 천수 누리고 명 다한 고목 등걸 바람도 스쳐가고 새들도 오잖는데 움 하나 새 명 받들어 하늘 여는 신비함 명 받아 눈 떠보니 날개 있되 날 수 없네 날지 못하고 죽을꺼나 쉬지 않은 날개짓 명 걸고 탈거한 것은 방명(方命)인가 순명(順命)인가 생과 사는 천명이라 그 누가 말했던고 올 때는 명 받아 바람 실려 왔더라도 가는 건 내 마음대로 훨훨 날아 가고지고. ☆. 길가에 짓밟히는 풀포기, 땡볕 아래 모래밭을 사는 작은 벌레를 보면서 생명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느낀다. 6.25전쟁통에는, 하필이면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났을까 한탄도 원망도 했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그야말로 꿈에도 상상도 못했었다. 지금 이렇게 풍요와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행복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불평 불만이 가득하다. 옛날의..

17. 기 다 림

17. 기 다 림 어릴 적엔 까치발 딛고 ‘어디쯤 오실까’ 철들고는 야무지게 ‘내게 행운은 언제 오나’ 행여나 홍시 떨어지길 고대하던 빈 마음 누구는 로또 맞고 어느 집은 대박났대 나라고 안 오겠나 누구에나 온다는 것 멀거니 복바라기하다 한평생이 가버렸네 모두들 떠나갔고 해도 져서 어두운데 허공 향해 목을 빼는 얄궂은 기다림 꼴까닥 숨멎어야 끝나는 원초적 숙명인가 ☆. 요즘 초·중 학생들의 소풍지는 놀이기구가 있는 곳, 여러 사람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우리 학생시절의 소풍지는 언제나 그늘이 있는 잔디밭이었다. 하는 놀이도 정해져 있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수건돌 리기를 하든가 보물찾기, 씨름과 닭싸움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보물찾기는 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한 번..

7. 욕망

7. 욕망 손 맘자리에 시도 때도 없이 솟아오르는 맑다가도 뇌한 것 근원 모를 이 정체. ☆.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생겨난 이래 수십만년 동안, 인간사회를 들쑤셔놓고 혼란에 빠뜨리는 악을 없애고 교화하 여 선한 사회로 이끌어 가려고, 성인들을 비록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써 왔으며(적어도 절반 이상은 그런 사람들 이었을 것), 이 지구상에 나타난 여러 종교들도 ‘사랑/자비하라’, ‘천국/천당이 있다’고 끝없이 가르쳐온 바탕도 인간사 회를 바르게 만들려는 염원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한시도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절을 찾아볼 수 없다. 항상 어느 구석에서든 전쟁이 일어 나 대량살상과 유랑이 일어났고, 곳곳에서 어렵잖이 살인과 절도와 사기와…… 사행이 끊임없이 횡행하였다...

29.‘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29.‘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고맙습니다 출석했던 여러분 내가 안고 온 교직 인생의 끝자락을 마무르는데 멀리서 새벽 비행기까지 타고 달려와 준 여러분 고맙습니다 무엇이 무슨 힘이 그 먼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게 했으며 무엇이 무슨 힘이 그런 소탈하고 진지한 마음이 되게 했을까 생각해도, 생각해도 그건 각자 살아온 수레바퀴의 톱니에서 인연의 끈이 되었던 사제의 정이었겠지요 사제의 정! 나는 나, 가족, 시간, 미래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나름으로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귀한 시간 먼 길 달려온 기대만큼의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묻혀있던 작은 싹 하나라도 틔웠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행사를 치르고 난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한 과정의 담담함과 감사일 텐데 돌아보니 다하지 못..

28. 황혼, 그 기막힌 순간을 지나며

28. 황혼, 그 기막힌 순간을 지나며 살기 위해 죽을 각오도 했다 그땐 꽃밭도 바다도 죽기살기로 악다구니 치던 진흙밭. 별도 없는 밤 길 빛이란 오직 내 마음의 노래 밀리고 차여도 서럽고 두려운 게 무엇이 있었으랴. 이제는 죽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때 홀로 걷는 허허한 벌판에 부를 노래가 없다 들어줄 누군들 있으랴. 노을 지고 땅거미 내리는데 어제가 아쉽고 오늘이 서럽고 내일이 적막하여 독백하는 황혼길의 방담(放談). ☆. 『황혼, 그 기막힌 순간을 지나며』의 머리글. 황혼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처절한 아름다움이다. 황혼이 아름다운 건 아주 짧은 순간의 황홀함 때문일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이 다 그렇듯. 꽃이 그렇고, 일출 일몰이 그렇고, 구름이 그렇고, 미인단명(美人短命)이 그렇고, 행복..

27. 人 間에서

27. 人 間에서 웃음도 사람 사이에 눈물도 사람 틈에서 난다 마음을 재우려거든 人 間을 끊고 산의 침묵을 들으려면 人 間을 떠나 세월을 보려거든 人 間을 버려야지 연을 끊고 훨훨 날아가는 연 미련은 미련함이니 희망을 품었다면 비록 지옥이 마중온단들 人 間에서 헤어져야지 ☆. 나는 차(茶)를 모른다. 차의 맛도 멋도 모른다. 새로 나는 찻잎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따서 그렇게 말리고 덖고 한 사람 의 정성이 담긴 제대로 된 차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차를 만났어도 여유와 한가로움으로 사 색을 마셔야 하는데,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그런 비트는 여유와 조는 한가로움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도 차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떤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

6. 예술아

6. 예술아 그 알몸으로 악다구니 속에서 어찌 피는가 ☆. 그 하고많은 자연물 중에 가장 속된 인간에게서 어찌 이런 것들이 탄생되는 걸까? 이 생명이 난잡한 인간사에 휘둘리지 않고, 늘 그 소리와 빛과 색채와 모습과 그 의미들 속에서 일렁일렁 흔들리고 느 꺼워하다가 스러질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