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 81

25. 여운(餘韻)

25. 여운(餘韻) 등바닥 따스해오는 어렴풋한 새벽 아련한 꿈길 속으로 울려오던 어머니 도마질 소리의 아침이 쉬고있는 고즈넉한 터에 물에 잠긴 몸에 파문을 그려오던 성당 종소리의 맹꽁이 울어대던 보릿고개 늦저녁 고단한 삶을 다독여주던 건넛마을 다듬잇소리의 전봇대 신음하던 섣달그믐 밤 늦도록 홀로 적막을 달래주던 늙으신 아버지 기침소리의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울림. ☆. 기억에서도 지워져가는 오래 전의 소리들이지만 어느 순간 문득 여운이 되살아나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다시는 들 을 수 없는 것들이기에 더욱 간절해지는 것 같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힘들었던 날들이었지만 가슴을 울리고 따뜻한 정 이 스미는 이런 소리들이 있었기에 살아가는 용기와 힘이 살아났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아쉽고 공허한 것은..

24. 자문(自問)

24. 자문(自問) 빼꼼히 벌어진 세상 문 틈으로 누군가에게 물어본 것 같다 내 배당금 얼만가요 대답이 없었다 정수리를 내밀며 또 물었다 내 모가치는 어디 있나요 네 능력만큼이다 숨을 몰아쉬며 그러면 능력을 주세요 그건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기르는 것이다 문밖을 나섰다 잘살게 해 주나요 한참만에 망석중이 되려느냐 아무도 너를 어쩔 수 없고 너 또한 망석중이를 원치 않으리니 남에게 묻지 말고 너에게 물어보라 이승문을 나설 때 나에게 물어봐야겠다 잘 살았느냐고 ☆. 밖은 올 겨울 들어 최강 한파라는데 남으로 난 창 안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자리끼가 얼 정도로 외풍이 심했던 집에 서, 입는 것도 변변치 못하여 화로를 끼고 살던 옛날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며 목화솜 같은 안도가 한가롭게 감싸안는 다. 코로..

10. 빨랫줄

10. 빨랫줄 지도 그린 이부자리 땀 내 전 고의적삼 집안 애환 내걸어 말리고 바랬는데 이제는 이름 석자도 역사속으로 사라질 듯 무게가 버거우면 바지랑대가 받쳐주고 날마다 내걸어도 젖은 손길이 정겨웠지 이제는 내팽개쳐져 늘어지고 녹슬었다 팽팽히 긴장하며 한평생을 당겼었지 힘겹고 고달파도 운명이라 생각했지 공치사 바란 적 없으나 서운함이 흔들린다 ☆. 예전에는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요용물이었다. 이사 갈 때도 먼저 빨랫줄을 걷어다 새 집에 걸었다. 주로 철사줄 이 사용되다가 6.25전쟁 후에는 군대 통신용 전선이 널리 사용되었다. 빨랫줄에 내걸리는 빨래를 보면 그 집안의 삶과 애환을 엿볼 수 있었다. 주택이 아파트로 바뀌고 빨랫대가 대신하면서 빨랫줄은 옛 시골집에서나 볼 수 있는 추억물이 되어 머지않..

23. 그곳, 좋겠다

23. 그곳, 좋겠다 人 間이 아니라도 좋겠다 볏모 안으려 알몸 찰람한 5월의 무논 옥토가 아니어도 좋겠다 풀머리 어우러져 춤추는 유유한 풀벌 천국이 아니어도 좋겠다 잔물결이 목새와 종일토록 사분거리는 모래톱 그곳이라도 좋겠다 돈 행복이 없는 곳 그곳이라면 좋겠다 創初의 自然 그대로의 곳 純然한 곳이라면 그냥 좋겠다 마른 세월의 강에 윤회의 물레방아 멈춘 그곳. ☆. 그 맑던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려올 듯하던 별들도 창을 닫습니다. 하늘은 온통 물바다가 된 듯하고, 이땅도 기후 재난으로 인간이 더 도망칠 곳이 없어집니다. 인간이란 동물이 이땅에 생겨나 겨우 몇 백만 년 동안에 이 아름다 운 땅을 온통 분탕질하고 남은 것들을 인류문화유산이라고 지정해 놓고 자랑질하고 있는데, 이 상처투성이의 회복 불..

22.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22.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말 없는 몰두의 몸짓 뜨거운 마음이 시선이 오직 하나뿐인 무념의 세계가 남 탓 지다위 않는 스스로의 믿음이 자만 않고 겸손에서 비롯한 옹골찬 책임감이 일심에 단심(丹心)이 밴 뜨거운 땀방울이 희망 감동과 함께 하고 만족이 성애되는 까닭입니다. ☆. 흙 한 점 있을 것 같지 않은 바위 틈새에 싹을 틔운 잡초를 봅니다. 한여름 길바닥에 홀로 열심히 더듬질하고 있는 개 미를 봅니다. 이들은 극한의 환경에서도 자신의 생명에 온 힘을 다합니다. 한편으로 애처롭기도 하지만 그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아름답게 느껴져 생명의 숭고함을 느낍니다. 사람도 서툰 욕심 없이 열심히, 그래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늘 행복과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어쩌다 ..

9. 싸리비

9. 싸리비 법고소리에 눈비비고 댓돌로 나선다 태초의 신비런가 산사의 새벽 뜰 싸리비 스쳐간 공덕에 이슬비 스며들다 시절 얼룩에 너저분한 낙서들 어수선한 내 한뉘 뜰 쓸어줄 비 없는가 싸리비 보이지 않고 땅거미는 내리고 ☆. 70년대, 도시 큰 학교와 시골의 작은 학교가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하며 선물도 주고 받았는데,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서 학생들 모금으로 학용품, 운동 도구 같은 것을 사 보내면, 시골 자매학교에서는 학무모들이 싸리비를 매어 한 차씩 답장을 보내왔다. 그 싸리비는 일 년 내 학교 운동장과 교사 구석구석을 깨끗이하는 데 절대적이었다. 한 해가 지나면 싸리비는 거의 닳아 몽당비가 되고, 또 새 싸리비가 연례처럼 배달되었다. 늦가을이 되면 집집마다 한겨울 동안 난방으로 쓸 화목을 장만하였는..

8. 미명

8. 미명 파도가 되리라는 미명(美名)을 앞세우고 한평생 미명(微明)을 더듬고 헤쳤어도 여태껏 한 치 앞 모르는 내일도 미명(未明) 이름이 좋아야 입신양명 한다기에 개명을 할까 말까 어름대다 말았었지 미명(美名)에 명운 걸었더면 내 뜻대로 됐을까. ☆. 이 세상 모든 물체에는 이름이 붙어있다. 언제 누군가에 의하여 처음 붙여진 이름이겠는데, 어떤 지명(地名)은 역사나 현상에 정말 기막히게 잘 들어맞는 것 같아 감복할 때가 있다. 세상만사를 경영하는 사람의 이름은 더없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며 성명학(姓名學)도 생겨났고, 본 이름 외에 아명이니, 자니, 호니 하 는 걸 만들어 본 이름을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예부터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들은 유명 작명가를 찾아다니기도 ..

7. 노심(老心)

7. 노심(老心) 가슴이 뜨끔해도 갈 때가 되었는가 허리가 시큰해도 맘 먹으란 신호인가 창밖의 마지막 한 잎에 매달리는 이 마음 쌓았다가 허물고 칠한 위에 또 개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색 변하는 이 마음 마지막 부칠 편지는 여전히 백지인데 젊은 날엔 몰랐었지 그 바람이 춘풍인 줄 길 가다 스친 소매 그것이 인연인 걸 눈 뜨고 같이 늙어가는 어리석은 이 마음 발길 없는 겨울 호수 갈댓잎만 버석인다 스산히 펼쳐진 허허로운 수면엔 짝 잃은 기러기 한 마리 마음처럼 떠있고. ☆. 근심 걱정 슬픔 불만 궁금함 즐거움 기쁨 그리움 소망 기대 …… 이 모든 것들이 이 나이에도 여전히 제멋대로 들락날 락한다. 가만보니 내가 붙잡고 실랑이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마는 것 같다. 풀씨 하나 땅에 떨어져 싹 틔워 바..

2. 가을 나비

2. 가을 나비 꽃잔치인가 허겁지겁 갔더니 단풍나무 숲 한탄한들 어쩌랴 잘못 타고난 것을. ☆. 늦가을 볕이 쬐는 빨간 단풍나무잎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것도 같았고, 허기에 지쳐 주저앉은 듯한 그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와 보였다. 답답하고 하릴없어 TV를 켜면, 안타까운 장면들이 마음에 돌팔매질을 한다. 중남미 좌파정권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 여 아이들 손을 잡고 정든 고국을 떠나 살 곳을 찾아 길게 늘어선 이민행렬, 아프리카 후진국의 영양실조된 아이들의 형상. …….. 저들, 나와 똑 같은 저 사람들. 영문도 모르는, 스스로 어쩔 힘도 없는 저 아이들은 전생에 무슨 죄인가?

21. 나머지공부

21. 나머지공부 짝꿍마저 돌아간 널따란 교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턱을 괴고 앉아 책 속의 옛 얘기도 선생님의 내일 말씀도 도무지 뵈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내 생각엔 뒤떨어진 것도 더 배울 것도 없는데 아르르 왜 나만 남겨놓은 것일까 날은 어둡고 눈발은 날리고 데리러 오는 사람도, 가도 좋다는 말씀도 없어 핑그르르 그만 눈물이 돈다 앙상히 식어가는 가슴을 붙잡고 어두운 골목에 서서 어어이, 야들아 불러도 대답없는 술래가 되고만다. ☆. 옛날 국민학교에 나머지공부라는 게 있었다. 학력이 뒤쳐져 수업시간에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학습 지진아(遲進兒) 라고 부르며 방과 후에 따로 남겨 공부시키는 것이었는데, 한글이나 사칙을 깨치지 못한 아이들이 주 대상이었다. 삶 의 형편도 교육환경도 열악했던 때였으니 지진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