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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념

8. 무념 바닷가 바위 끝 암자 하나 담장 너머 능소화 두어 송이 열린 법당 안 빙긋 웃음짓는 부처님 실눈 한밤 달은 밝은데 댓닢 스치는 한 줄기 바람소리 ☆. 버스는 남도(南道)의 시골 자락을 구불구불 휘돌아 간다. 그 자락마다 드문드문 인적 끊긴 집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고 독(孤獨)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 있다. 흔들거리는 내 몸도 시골길이 된다. 숲 속 돌다리 건너 계단을 오른 언덕 위에 작은 암자가 있다. 속세의 먼지를 떨쳐버리듯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선다. 시간이 멈춘 듯한 한여름의 산사(山寺)는 한적하고 고즈넉하다. 잠시나마 미혹(迷惑)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문 열린 법당에는 석조미륵불 하나만 오롯이 가부좌를 하고 있다. 들판을 달린다. 목적지도 없는 듯 그저 달려간다. 간간이 창..

7.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멥니다

7.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멥니다 인큐베이터 영아병동 전쟁고아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 이민 행렬 이산가족 불귀(不歸)의 국군포로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 길가 벤치의 무의탁 노인 빛바랜 무명용사 비 부모 찾는 해외입양아의 편지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 늦가을 밤비 첼로의 솔베이지 노래 단오장 곡마단의 트럼펫 소리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꼬깃꼬깃 접은 10원짜리 한 장 땡볕 비탈밭 노파의 등허리 빛바랜 사진 아래 나뒹구는 망자의 유품 아……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 가슴에 맺혀 오래도록 남는 한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인간관계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피해가 큰 자연재 해도 개개인이 겪은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면 모두에게 그리 오래 남아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2019년 12..

6. 옛날얘기

6. 옛날얘기 바느질하는 엄마 곁에 화로를 안고 앉아 옛날얘기를 조릅니다 무릎을 흔들며 실끝을 당기며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호렝이 담배 먹던 시절 깊은 산 속 어느 마을에 호랑이가 바람을 몰고오나 봅니다 싸락눈이 문풍지를 때립니다 바깥문이 덜컹거립니다 콩닥콩닥 가슴이 뜁니다 꼬부랑 할멍이가 살았대 ‘에이, 또 그 얘기’ 하면서도 침을 꼴깍 삼킵니다 엄마 곁으로 바짝 다가앉습니다 어느 날 꼬부랑 할멍이가 꼬부랑 지팽이를 짚고 꼬부랑 길을 가는데 굽은 허리춤에서 나오던 하얀 곶감과 헝클어진 흰머리의 외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솔바람 소리 무섭던 외갓집 오솔길 소름이 돋습니다 꼬부랑 똥이 매렵더래 꼬부랑 낭게 올라가 꼬부랑 똥을 누는데 꼬부랑 개가 와 꼬부랑 똥을 먹더래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쥐었던 주먹이 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