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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저 소리 없는 소리를

15. 저 소리 없는 소리를 초봄 양지쪽 새싹의 고고 (呱呱) 소리 새벽이슬에 연꽃 입술 여는 소리 한낮 파도 위에 자지러지는 햇빛 웃음 소리 산골 저녁연기 속으로 걸어들어오는 커다란 함박눈의 발자국 소리 초원의 풀잎이슬로 내려앚는 한밤의 별빛 소리 그리고 광음 흘러가는 소리를 늙어가는 실향민의 한 쌓이는 소리 십자가 밑 소녀의 눈물 방울 흐르는 소리 홀로 사는 오막살이 노파의 주름지는 소리 산골짜기에 쓰러져 숨진 소년병의 마지막숨 소리 유월마다 달력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빛 절규의 소리 그리고 인간세상 굴러가는 소리를 ☆. 우리는 날마다 좋든 싫든 수많은 소리를 들으며 산다. 들리지 않았으면 좋을 소리가 들려 심성이 사나워지기도 하고, 들려줬으면 하는 소리가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아 서운하고 안타까울 ..

14. 무 제(無題)

14. 무 제(無題) 어제는 종일토록 툇마루 난간에 땀에 젖어 뒤척이다 날아온 박새 한 마리 고스란히 창 앞에 묻었었다 오늘은 빛나는 촉루(燭淚)에 매달려 흙먼지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다 넘어지다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가 된다 내 살아 있음에 내일은 밀린 일기를 쓰자 파도에 씻기우던 바위를 노래하자 저녁놀 아래 말없는 청산도 그리며…… ☆. 공들여 쌓아온 탑은 그새 모래성의 흔적으로만 남았는데, 삐끔한 문밖을 내다보니 안갯속이다. 웅크리고 앉아 어쩌지 도 못하는 이 무력함이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명상록』을 다시 펴 든다. 고교 시절 ‘페이터의 산문’을 배울 때는, 어려운 한자 낱말도 많고 절망뿐인 인생에 거부감도 있었고 납득되지 않는 말이 많아 두 번 다시 읽고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붙어있는 숨 ..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13.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늘어가는 주름 하나 하나가 세월이 쓸고 지나간 자국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 주름 사이 사이마다 부끄럽던 실수나 실패의 검은 얼룩은 말고 고운 추억의 무늬들이 자리하게 하소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교훈이 되었던 아픈 기억들이 살덩이 속으로 묻히지 않게 하소서 희어진 성긴 머리카락이 세파에 시달린 초라한 흔적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 한 올 한 올을 바래게 한 고심과 고통의 날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 형형(炯炯)한 흰 빛으로 하여 닦아온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녹슬지 않게 하소서 멀어져가는 초점을 핑계로 세상의 불의와 비통을 못 본 체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돋보기 너머일망정 널리 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여전히 건승함을 증명하게 하소서 이 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