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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더라

12. 더라 바늘끝마음 하나 세울 자리 없네 고개를 드니 눈 밖은 끝없는 세상이더라 운명의 여신은 어디에 빌며 헤매었는데 여신은 마음속에 앉았더라 하늘로 목은 늘어나고 등허리 허전하다 바라고 기댈 곳은 나뿐이더라 내 땅은 산비탈 자갈밭 하늘만 쳐다보았네 비는 마음속 구름에 있더라 내다보니 내일 앞에 또 내일 발밑을 내려다보니 오늘이 절벽 끝에 섰더라 어디로 어디까지 가려는가 왜 가야 하는가 명이더라 ☆. M국민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한참 선배되는 한 분이 날마다 교무실 칠판에 유머나 격언 같은 걸 한 토막씩 쓰고는 해 설이나 농담 비슷한 토를 붙여놓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 ‘미’라고 쓰고는,‘나는 내 일생이 수우미양가(당시 학습 평가 5 단계) 중에 ‘미’만 되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때 내 얕은..

11. 홍콩 단상(斷想)

11. 홍콩 단상(斷想) 코발트빛 청화백자 접시 위에 버터로 구운 햄버거 하나 백 년을 다듬고 가꿔온 네온등 아름다운 남국의 정원 현란한 조명 아래 나이 찬 무희(舞姬)의 치맛자락 끝에 매달려 흔들리는 구슬 오월 초이레 곡마단 트럼펫 소리 뒤로 마지막 손님 부르는 저물녘의 단오터 (2002년 3월) ☆. ‘홍콩 간다’는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건 80년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황홀경에 빠진다’는 뜻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언 뜻 와닿지 않아 멍청했었다. 우리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89년 이전부터 홍콩은 속어(俗語)에 등장할 정도로 환상 적인 도시, 별천지의 대명사였다. 6.25 전쟁의 잿더미에서 끼니도 잇지 못해 허덕이던 때(1954)인데 ‘홍콩아가씨’란 유 행가가 대히트를 했을 정도니까. 그 말도 이제..

4. 노우(老友)

4. 노우(老友) ‘이 몸살 떨어지면 봄 산행 같이 가자’ 그 기별 기다리며 귀뚜리와 지새운다 떠난다 한 마디 말도 없이 혼자 먼 길 떠났는가 『샘터』 2013년 12월호에 실림 ☆. 동네에 전화가 없던 나의 어린 시절(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어떻게 생긴 건지 본 적도 없었던), 원방의 소식은 편지로, 급한 일은 전보로, 다급한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 전해 왔다. 그때는 편지 한 장도 그렇게 반갑고 귀할 수가 없었다. 설면한 관계의 소식들은 시간이 지나 소문으로 바람에 실려왔다. 그래서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지들은 무소식이 곧 희소식이라 했다. 지구 반대편 먼 외국에 있는 사람과도 시시콜콜히 수다떨며 살아가는 요즈음의 일상으로 보면, 옛날에 답답해 어떻게 살았을까 하지만, 대화 못해 우울증 걸렸다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