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시절가조(時節歌調) 20

9. 싸리비

9. 싸리비 법고소리에 눈비비고 댓돌로 나선다 태초의 신비런가 산사의 새벽 뜰 싸리비 스쳐간 공덕에 이슬비 스며들다 시절 얼룩에 너저분한 낙서들 어수선한 내 한뉘 뜰 쓸어줄 비 없는가 싸리비 보이지 않고 땅거미는 내리고 ☆. 70년대, 도시 큰 학교와 시골의 작은 학교가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하며 선물도 주고 받았는데,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서 학생들 모금으로 학용품, 운동 도구 같은 것을 사 보내면, 시골 자매학교에서는 학무모들이 싸리비를 매어 한 차씩 답장을 보내왔다. 그 싸리비는 일 년 내 학교 운동장과 교사 구석구석을 깨끗이하는 데 절대적이었다. 한 해가 지나면 싸리비는 거의 닳아 몽당비가 되고, 또 새 싸리비가 연례처럼 배달되었다. 늦가을이 되면 집집마다 한겨울 동안 난방으로 쓸 화목을 장만하였는..

8. 미명

8. 미명 파도가 되리라는 미명(美名)을 앞세우고 한평생 미명(微明)을 더듬고 헤쳤어도 여태껏 한 치 앞 모르는 내일도 미명(未明) 이름이 좋아야 입신양명 한다기에 개명을 할까 말까 어름대다 말았었지 미명(美名)에 명운 걸었더면 내 뜻대로 됐을까. ☆. 이 세상 모든 물체에는 이름이 붙어있다. 언제 누군가에 의하여 처음 붙여진 이름이겠는데, 어떤 지명(地名)은 역사나 현상에 정말 기막히게 잘 들어맞는 것 같아 감복할 때가 있다. 세상만사를 경영하는 사람의 이름은 더없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며 성명학(姓名學)도 생겨났고, 본 이름 외에 아명이니, 자니, 호니 하 는 걸 만들어 본 이름을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예부터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들은 유명 작명가를 찾아다니기도 ..

7. 노심(老心)

7. 노심(老心) 가슴이 뜨끔해도 갈 때가 되었는가 허리가 시큰해도 맘 먹으란 신호인가 창밖의 마지막 한 잎에 매달리는 이 마음 쌓았다가 허물고 칠한 위에 또 개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색 변하는 이 마음 마지막 부칠 편지는 여전히 백지인데 젊은 날엔 몰랐었지 그 바람이 춘풍인 줄 길 가다 스친 소매 그것이 인연인 걸 눈 뜨고 같이 늙어가는 어리석은 이 마음 발길 없는 겨울 호수 갈댓잎만 버석인다 스산히 펼쳐진 허허로운 수면엔 짝 잃은 기러기 한 마리 마음처럼 떠있고. ☆. 근심 걱정 슬픔 불만 궁금함 즐거움 기쁨 그리움 소망 기대 …… 이 모든 것들이 이 나이에도 여전히 제멋대로 들락날 락한다. 가만보니 내가 붙잡고 실랑이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마는 것 같다. 풀씨 하나 땅에 떨어져 싹 틔워 바..

6. 티눈 하나

6. 티눈 하나 인생사 무사무고란 야무진 희망일 뿐 천재지변만 저어하랴 믿던 도끼 발등 찍고 발바닥 티눈 하나에 일상이 절뚝이네 봄볕이 좋다 하나 바람이 시새우고 물거울 같은 내마음에 무심한 돌 날아드네 무심코 흘린 말씨 하나 목에 걸려 대롱대롱 평화로운 초원에 하이에나 설쳐대고 맑은 강물 흐리는 건 미꾸라지 한 마리 만물의 영장 세상이라고 예외는 아니로세. ☆. 하루 하루 배 채우는 일도 어렵던 어린 시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사는 줄 알았었다. 한참 후에 선진국 사람들은 발달된 문명의 혜택을 흠뻑 받고 큰 불편함 없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 리는 왜 이렇게 사는가, 언제 우리도 저렇게 잘 살 수 있을까 부러워하고 잘못된 나라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지금..

5. 강릉 이모우션(Emotion)

5. 강릉 이모우션(Emotion) 야들아 마카 일루와 쫄로리 서 봐 우리 어머이(꼭지이응'이')가 소꼴기 논고 준대 야이야 니들 퇴냈다 이 어신 때 소꼴기라니 해마두 단오날이믄 남대천 천방뚝에 아주머이가 지져내는 소두베이 감재적 울매나 맛이 좋은지 니따구들이 알겠나 우리 하르버이는 소낭그가 최고래요 소아리 소갈비에 소께이 뜨꺼지까지 앞 등강 보독솔밭도 솝복해서 좋대요 지누아리 장쩨이에 는제이 나물무침 농매갈 감재떡은 다 식어빠지는데 상거두 머하느라 못오나 애거 말러 죽겠네 자아거 따러댕기미 저닷하게 발광하우야 부세이 떨지말고 가마이 좀 못 있나 실공에 개눈까리 달라고 떼꾸렁 쓰는기래요 해목 가면 불가에선 불찜질에 조갑지 줍고 물에 들면 섭 째복에 해오이가 개락이지요 나릿가 재미시러운 일 우떠 다 말하우..

4. 노우(老友)

4. 노우(老友) ‘이 몸살 떨어지면 봄 산행 같이 가자’ 그 기별 기다리며 귀뚜리와 지새운다 떠난다 한 마디 말도 없이 혼자 먼 길 떠났는가 『샘터』 2013년 12월호에 실림 ☆. 동네에 전화가 없던 나의 어린 시절(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어떻게 생긴 건지 본 적도 없었던), 원방의 소식은 편지로, 급한 일은 전보로, 다급한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 전해 왔다. 그때는 편지 한 장도 그렇게 반갑고 귀할 수가 없었다. 설면한 관계의 소식들은 시간이 지나 소문으로 바람에 실려왔다. 그래서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지들은 무소식이 곧 희소식이라 했다. 지구 반대편 먼 외국에 있는 사람과도 시시콜콜히 수다떨며 살아가는 요즈음의 일상으로 보면, 옛날에 답답해 어떻게 살았을까 하지만, 대화 못해 우울증 걸렸다는 사람..

3. 박물관에서

3. 박물관에서 누천년 전 그 미소가 어제인 듯 생생하여 고작 칠십 지나온 내 자취 돌아본다 처마 끝 풍령 자락에 바람이 스친다. 저와 나 사이의 세월은 간 곳 없고 느껴올 숨결을 유리가 막아섰다 눈감고 내 숨도 멈춰라 천 년을 덮을세라 시공(時空)도 덧없고 목숨도 속절없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창밖엔 햇빛이 눈부신데 그림자가 흔들린다 ☆. 가끔 박물관에 가 옛 그 시대의 풍정에 빠져보기도 하고, 주말마다 TV쇼 진품명품을 넋을 놓고 꿈속인 듯 즐긴다. 이 런 행동은 나의 어떤 역사 의식에서라기보다 인간의 뿌리에 대한 원천적 동경에 대한 무의식적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마음이 개운하고 시원해진다기보다 오히려 묵직한 무엇, 인간의 역사에 대한 신비와 의문 ..

2. 대추볼 마음

2. 대추볼 마음 고향집 추수라며 부쳐온 붉은 대추 탐스런 진홍빛은 가을볕과 정성일레 노 스승 장수하라는 제자의 대추 볼 마음 보고 안 먹으면 늙는다는 목밀(木蜜)을 한두 알 입에 넣어 혀 끝으로 음미하니 스르르 달콤한 그 정성 온 몸에 스미네 ☆. 50여년 전 제자로부터 집에서 수확했다는 대추를 받고 문득 젖어오는 소소한 이 행복감. ‘왜 사는가?’ 물으면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들 한다. 모두들 행복을 바라면서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도모한다. 돈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궁극은 행복을 구하는 노력인 것이다. 그런데 80 평생을 살아보니, 삶의 행복이 란 어쩌다가 특별하고 거창한 무엇이 쏟아지듯이 주어지는 것보다(그런 것이란 자주 오는 것이 아닐 뿐더러),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감동이 수..

1. 하일 서정(夏日抒情)

1. 하일 서정(夏日抒情) -여름 한낮의 교정- 교사가 떠나갈 듯 소란하던 소리들 온종일 들썩이던 생동하던 활기들 모두들 산으로 바다로 보내고 불볕 아래 잠 든 교정(校庭). 바람은 잦아들어 풀잎 하나 까딱 않고 운동장은 속살 드러낸 채 은밀히 누워있다 한순간 세상이 혼절(昏絶)한 듯 시간도 멎은 듯. 일하던 개미들도 자취를 감추었고 절규하던 매미는 울다 지쳐 잠들었다 불현듯 비행음 한줄기 졸리운 정적(靜寂)을 깨운다. ☆. 무섭도록 쓸쓸한 삶의 고독에 휩싸일 때가 있지요. 이 세상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듯한 알 수 없는 두려움. 삼복 중의 한낮, 시골 학교 당직.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인 것 같았습니다. 활짝 열어놓은 창밖은 붉은 태양에 점령당한 듯. 운동장은 어제 내린 소나기에 하얗게 삼베로 염을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