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kilshi | 2006-09-25 21:47:01, 조회 : 1,766 |
1990년대 초 일본에 있을 때, 우리 아이들 학교가 집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사람들도 그렇게 많이 다니지 않는 통학로 길가에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그 감나무에는 매년 아주 탐스러운 감이 주렁주렁 달렸었다. 그 감은 주인이 없었는지 익어서 바알갛게 먹음직스런 홍시가 되어도, 익다 못해 땅에 떨어져도 아무도 따가거나 주워가는 사람이 없어 나는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좀 따고싶었지만, 한국 파견 공무원 체면에, 아이들 학부모 체면에 따거나 주울 수 없어 안타까워 조바심한 적이 있었다. 저걸 누군가가 따면 좋을 텐데,……. 저렇게 아까운 것을……. 하면서.
분당중학교 교정에 앵두나무, 매실나무, 대추나무. 머루나무, 포도나무, 등 과일나무가 제법 있다. 그런데 그 열매들이 잘 익으면 휴일에는 누군가가 손을 대는 것 같은데, 평일에 별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우리 아이들은 손을 대는 것 같지 않았다. 특히 앵두, 포도, 머루는 손을 뻗으면 얼마든지 닿는 곳에 빠알갛게 익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도 이제는 민도가 꽤 높아졌다고 생각하였다.
며칠 전 신문과 방송에서 청계천변 사과나무의 사과를 누군가 따가 모두 없어졌다고 크게 보도한 적이 있었다. 나도 청계천 변을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가을이 와 이 사과나무에 사과가 빠알갛게 익어 매달린 것을 상상하곤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이게 뭐니? 우리나라 역시 아직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구나!
요즘 허리 때문에 양재천변을 자주 걷는데, 그젠가 멀리서 보니 여자 남자 여러 명이 나무에 매달려 흔들고 가지를 잡아당기고 야단이었다. 아마도 이제 막 발그스레 볼이 익어가는 그 대추나무인 것 같았다. 그것도 신이나서 소리를 질러가며……. 나는 한 마디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까이 가 보니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기가 죽어서 그만 두었다.
어제 나는 대모산에 올라갔다. 리시버를 귀에 꽂고 열심히 들으며 올라가는데, 바로 발끝에 작기는 하지만 아주 옹골차게 잘 익은 알밤 하나가 떨어져 있다. 아이구! 이게 뭐야. 주위를 둘러보니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나는 부지런히 줍다 말고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냥 지나쳤어야 하나?
바보의 어리석은 짓은
Folly in fools bears not so strong a note
As fool'ry in the wise when wit doth dote.
(Love's Labor's Lost 5.2.75-76)
바보가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은 현명한 자가
어리석어 저지르는 바보짓보다는 눈에 띄지 않는답니다.
(『사랑의 헛수고』5막2장 75-76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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