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시(詩)

21. 나머지공부

최길시 2021. 12. 30. 13:42

21. 나머지공부

 

짝꿍마저 돌아간

널따란 교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턱을 괴고 앉아

 

책 속의 옛 얘기도

선생님의 내일 말씀도

도무지

뵈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내 생각엔

뒤떨어진 것도 더 배울 것도 없는데

아르르

왜 나만 남겨놓은 것일까

 

날은 어둡고 눈발은 날리고

데리러 오는 사람도, 가도 좋다는 말씀도 없어

핑그르르

그만 눈물이 돈다

 

앙상히 식어가는 가슴을 붙잡고

어두운 골목에 서서

어어이, 야들아

불러도 대답없는 술래가 되고만다.

 

 

 

 

. 옛날 국민학교에 나머지공부라는 게 있었다. 학력이 뒤쳐져 수업시간에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학습 지진아(遲進兒)

   라고 부르며 방과 후에 따로 남겨 공부시키는 것이었는데, 한글이나 사칙을 깨치지 못한 아이들이 주 대상이었다.

   의 형편도 교육환경도 열악했던 때였으니 지진아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꽤 집요하게 나머지공부

   를 시켰던 것 같다. 이 아이들을 하루빨리 지진아 그늘에서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사의 어떤 의무감 같은 것도

   작용했던 것 같고, 스승의 은덕을 베푼다는 어쭙잖은 자만(自慢)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리석음과 부끄러움이 덮누른다. 그 아이에게 그걸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죄스러움

   이 무겁다. 그 아이의 마음과 심정을 헤아려줄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그 아이는 얼마나 불안하고 서글프고 외로웠

   을까?

 

    지금 나는, 이승의 지진아가 되어 점점 텅 비어가는 교실에 남겨져 하릴없이 오도카니 앉아있다. 글자도 눈에 들어오

   지 않고 더 공부할 마음도 없다. 옆 반에도 나처럼 나머지공부로 여태 남아있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창밖에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고 있는데……. 무섭고, 외롭고, 서글프다. 나도 고콜불이 아련히 비치고 아랫목이 따뜻

   한 내집, 영원한 내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이제 돌아가도 좋다고 선생님이 허락도 내리지 않고, 귀를 세워도

   서 가자고 데리러 오는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최길시 시집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 그곳, 좋겠다  (0) 2022.01.11
22. ‘열심’이 아름답습니다  (2) 2022.01.08
20. 말도 없이  (0) 2021.12.27
19. 동백꽃  (0) 2021.12.26
18. 아가야  (0) 2021.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