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단가(短歌). 하이쿠(俳句)·센류(川柳) 17

6. 예술아

6. 예술아 그 알몸으로 악다구니 속에서 어찌 피는가 ☆. 그 하고많은 자연물 중에 가장 속된 인간에게서 어찌 이런 것들이 탄생되는 걸까? 이 생명이 난잡한 인간사에 휘둘리지 않고, 늘 그 소리와 빛과 색채와 모습과 그 의미들 속에서 일렁일렁 흔들리고 느 꺼워하다가 스러질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5. 홍련암에서

5. 홍련암에서 처얼썩 솨아 천년을 염불하는 파도의 기도 파랑새 부르는가 푸른 저녁 종소리 ☆. 바다는 내게 그리움이요 아픔이요 희망이었다. 그 바다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같은 자세로 있어주어 나는 안심할 수 있었고, 파도소리를 아파할 수 있었고, 그 너머를 동경할 수 있었다. 검푸르게 가없이 펼쳐진 바다! 바다를 좋아한다는 어느 제자가 언젠가 이런 글을 보내온 적이 있었다. ‘오래 보지 못했던 철 지난 고향 앞바다에 가 보았습니다. 여름철 내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 가까운 산속에서 지내고 돌아온 갈매기들, 어지러운 그림자를 피해 먼 바다로 밀려나갔던 착한 물고기들이 돌아와 있었고, 광란의 발길에 채여 상처투성이던 모래밭도 다독여주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다시 편안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바다는 읽을 수 없..

4. 거미 왕국

4. 거미 왕국 날이 갈수록 촘촘해진 거미줄 날 곳은 어디 거미왕국 닮아서 두꺼워지는 법전 ☆. 따뜻하고 평온한 숲이 있었다. 그 숲에 독거미 몇 마리 생겨나 구역을 나누어 가지고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더니 날마 다 더 촘촘히 쳐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거미줄에 독나방은 걸리지 않고 여리고 힘없는 하루살이들만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 거미왕국 안 독나방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독나방은 그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묘책을 파악하고 있었든지, 아니면 거미줄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안에서만 활개를 치고 살아가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법전이 나날이 저렇게 두꺼워져 간다. 그런데도 세상은 요상하게도 점점 더 교활하게 꼬여가고, 독거미 새끼들만 활 개치고 나대는 건 무엇 때문일까? 석가나 예수 같..

3. 거기 누구 있소

3. 거기 누구 있소 마음에 대고 거기에 누구 있소 소릴질렀지 끌탕하던 속내가 금세 조용해졌네. ☆. 마음 한쪽에서 햇살이 비치는가 싶더니 황홀한 상상과 벅찬 즐거움에 빠져들다가, 어디선지 돌연 검은 점 하나 나타 나더니 온통 속이 뒤틀리며 원망과 저주의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내 마음인데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니 어쩌랴! 그걸 내 뜻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면 여태 이런 사람이 아니겠지? 강아지의 마음을 읽어내어 훈련시키는 조련사의 능력도 대단하거니와 조련사의 뜻에 빗나감이 없이 순순히 따라주 는 강아지가 순진하여 귀엽기만하다. 사람들의 마음도 본디는 그렇게 순수하고 순진했을 것이다. 인간의 문명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마음도 다양 해져 변화난측해지지 않..

2. 가을 나비

2. 가을 나비 꽃잔치인가 허겁지겁 갔더니 단풍나무 숲 한탄한들 어쩌랴 잘못 타고난 것을. ☆. 늦가을 볕이 쬐는 빨간 단풍나무잎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것도 같았고, 허기에 지쳐 주저앉은 듯한 그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와 보였다. 답답하고 하릴없어 TV를 켜면, 안타까운 장면들이 마음에 돌팔매질을 한다. 중남미 좌파정권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 여 아이들 손을 잡고 정든 고국을 떠나 살 곳을 찾아 길게 늘어선 이민행렬, 아프리카 후진국의 영양실조된 아이들의 형상. …….. 저들, 나와 똑 같은 저 사람들. 영문도 모르는, 스스로 어쩔 힘도 없는 저 아이들은 전생에 무슨 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