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kilshi | 2008-08-13 12:36:29, 조회 : 873 |
<이해인 수녀님과 법정 스님의 우정어린 편지글과 詩>
[이해인 수녀님 맑은편지]
법정 스님께...
스님,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립니다.
비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던 스님,
꼿꼿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
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 냄새를 맡아 보라고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며칠 전엔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 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니, 하나같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처럼 향기로운 빛과 여운을 남기는 것들 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껏 써 보내 주신 글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나 가톨릭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 전, 저와 함께 가르멜수녀원에 가서 강의를 하셨을 때도 '눈감고 들으면 그대로 가톨릭 수사님의 말씀'이라고 그곳 수녀들이 표현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왠지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깊어져서 우울해 있는 요즘의 제게, 스님의 이 글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고, 잔잔한 깨우침과 기쁨을 줍니다.
어느 해 여름,
노란 달맞이꽃이 바람 속에 솨아솨아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보던 불일암의 그 고요한 뜰을 그리워하며 무척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이젠 주소도 모르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신 데다가 난해한 흘림체인 제 글씨를 늘처럼 못마땅해 하시고 나무라실까 지레 걱정도 되어서 아예 접어 두고 지냈지요.
스님, 언젠가 또 광안리에 오시어 이곳 여러 자매들과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 대조'도 하시고, 스님께서 펼치시는 '맑고 향기롭게'의 청정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길 기대해 봅니다. 이곳은 바다가 가까우니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물미역도 많이 드릴 테니까요.
[법정 스님 밝은편지]
이해인 수녀님께...
수녀님, 광안리 바닷가의 그 모래톱이 내 기억의 바다에 조촐히 자리잡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들로 속상해 하던 수녀님의 그늘진 속뜰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더구나 수도자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보다 높은 뜻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힘든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주님은 항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신의 조영 안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사람을 보다 알차게 형성시켜주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뜻을 귓등으로 듣고 말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수녀님, 예수님이 당한 수난에 비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일은 조그만 모래알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성인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
이번 길에 수녀원에서 하루 쉬면서 아침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일을 무엇보다 뜻깊게 생각합니다. 그 동네의 질서와 고요가 내 속뜰에까지 울려 왔습니다. 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산에는 해질녘에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꽃입니다. 갓 피어난 꽃 앞에 서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심기일전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 곳 광안리 자매들의 청안(淸安)을 빕니다.
[어느 날의 커피]
-이해인-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 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읽어 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 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이고
마시는 뜨거운 한 잔의 커피
아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친구여!]
-법정스님-
나이가 들면
설치지 말고 미운소리, 우는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리, 불평일랑 하지를 마소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적당히 아는 척,
어수룩하소.
그렇게 사는 것이 평안하다오.
친구여!
상대방을 꼭 이기려고 하지 마소.
적당히 져 주구려.
한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그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친구여!
돈, 돈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 해도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것.
많은 돈 남겨 자식들 싸움하게 만들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많이 뿌려서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친구여!
그렇지만 그것은 겉 이야기
정말로 돈은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꼭 잡아야 하오.
옛 친구를 만나거든 술 한 잔 사주고
불쌍한 사람 보면 베풀어주고
손주 보면 용돈 한 푼 줄 돈 있어야
늙으막에 내 몸 돌봐주고 모두가 받들어 준다오.
우리끼리 말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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