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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비' -이 경-

최길시 2021. 10. 5. 11:44
글쓴이 kilshi 2007-05-13 11:16:02, 조회 : 1,002

 

 

자 비

이 경

 

잘 썪어 부드러운 흙에 골을 내어

눈이 빨간 무씨를 놓고

재를 지내는 마음으로 흙을 덮는다.

까치가 쏘물다고 잔소리를 한다

우리가 가고나면 내려와 솎아 먹을 것이다.

씨를 묻고 내려온 뒷날 밤

마침맞게 천둥번개 치고 봄비 내린다

이건 썩 잘 된 일이다.

봄비가 씨앗 든 밭을 측은 측은 적시는 일만큼

크고 넉넉한 자비를 본 적이 없다.

모종을 얻은 밭의 기쁨이나

밭을 얻은 모종의 기쁨이 막상막하라

심어놓고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저만치 물러서야 한다.

 

 

 

토질 좋은 밭에, 우량하고 영근 씨앗을 심고, 알맞은 바람과 비에 정성이 곁들이면 그 싹은 한 치의 어김이 없이 바라는 대로 잘 자란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차지 않으면 기대만큼 자라지 않을 것은 당연한데, 우리들은 그저 심어놓기만 하고 기대를 앞세운다. 그것은 욕심이다. 비가, 바람이 무엇을 바라서 내리고 부는가? 정성을 들여 가꾸고 저만치 물러서서 바라보는 마음, 그것이 자비가 아니랴!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보통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겸손과 양심이면 그것으로 자비로운 것이 아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