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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최길시 2021. 10. 28. 07:00
글쓴이 kilshi [홈페이지] 2015-07-08 09:23:34, 조회 : 611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1915~2000)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사랑을 만나러 갈 때에는 들떠 두근거리지만 떠나올 적에는 다시 만날 기약이 없어 서운하고 아쉽다. 그러나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고, 헤어진 사람은 후일에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이 시를 읽으면 이별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가슴에서 슬픔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내 소소하게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이별의 기억에서도 한 송이 연꽃의 미묘한 향기가 날 것 같다. 게다가 이 생애 다음에 올 내생(來生)도 대낮처럼 훤히 보일 것 같다.

살랑살랑 불어가는 바람의 보법(步法)을 보시라. 우리가 하는 사랑의 밀어(蜜語)도 저 바람이 다 실어가리니. 연꽃은 진흙 속에 있지만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 모든 인연이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았으면. 모든 인연이 풍경을 뎅그렁, 뎅그렁, 흔들고 가는 한 줄기 맑은 바람 같았으면.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