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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기병대대 지휘관 장철부

최길시 2021. 10. 23. 06:08
글쓴이 김명기 [홈페이지] 2012-05-03 07:27:18, 조회 : 2,335

 

 

 

국군 기병대대 지휘관 장철부

장철부(張哲夫) 육군 중령(1921. 4. 17 ∼ 1950. 8. 4)
1921. 4. 17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41. 3 평북 오산고등학교 30회 졸업
1944. 1.20 일본 중앙대학교 재학 중 학병 징집
1946.12.25 중국 육군군관학교 제20기 기병과 졸
1948. 4. 6 육군사관학교 제5기 소위 임관


1921년 4월 17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출생한 장철부(張哲夫) 육군 중령은 1941년 3월 평안북도 오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일본 중앙대학에 입학하였다. 본명이 김병원(金秉元)으로 장철부라는 이름은 그가 중국에서 항일유격전을 펼칠 때 사용하던 것인데, 귀국 후에도 본명처럼 사용하였다. 일제말기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재학하던 중 학병으로 징집되었던 그는 중국 서주에서 일본군의 일원으로 싸워야 하는 치욕감을 떨쳐내고자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당시 학병에 대한 정책적인 고려로 면죄되어 일본군으로 복귀한 그는 재차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하자 항일유격대에 합류하였다. 그의 항일유격대 활동에 감동을 한 광복군이 김구(金九) 선생의 추천으로 그를 황포군관학교 (黃浦軍官學校)에 입학하도록 배려함으로써 1946년 12월 25일 기병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조국의 광복을 맞아 1947년에 귀국한 그는 동년 7월 1일 육군사관학교 제5기로 입교하여 1948년 4월 6일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과 구대장, 소대장 등을 역임하고 기병대대의 창설과 더불어 1950년 기병대대장에 보직되어 복무하던 중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기병대대장으로 청송지구 605고지 전투에 참여한 그는 1950년 8월 4일 적의 파상적인 공격에 맞서 싸우던 중 적의 총탄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자 권총으로 자결함으로써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소령에서 육군 중령으로 일계급 특진이 추서되었다. 아울러 일제시대 당시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으로 인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노병의 증언>


대한민국 육군에는 기병대대가 기갑연대에 편성되어 있었다. 현대전에서 기병은 수색정찰을 위주로 하고 때로는 보병전투도 겸하고 있다. 50년 6월 28일 북괴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도하에 혈안이 되어있던 때다. 기병대대는 천호동에서 한남동 대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심야에 한강을 결사적으로 도하했던 적군은 기병대대의 공격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때 남산을 점거한 적 포대는 기병대대 방어진에 집중포격을 가하여 진지는 불타고 있었다. 적의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속에서도 장철부 기병대대장은 늠름한 모습으로 마상에서 진두지휘하며 전선을 종횡무진했던 용감한 대대장이었다. 적의 예상집결지를 도상으로 지적한 대대장은 박격포로 사격하여 적의 반응을 보고 적의 화력과 병력, 위치까지 정확하게 판단하여 방어에 진력하는 탁월한 전술을 구사했다. 기병대대 제 6중대 소대장이었던 나는 대대장의 지시대로 적의 예상집결지인 서빙고 일대를 박격포로 맹타했다.

적의 포화 속을 달리던 대대장은 마치 영화 속의 용감한 기사의 웅자(雄姿) 같았으나 적의 포격은 대대장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터졌다. 참으로 기현상(奇現象)이 아닐 수 없었다. 유독 대대장만이 포격의 표적이 된 것을 본 나는 우리 진지 인근에서 수상한 자를 발견했다. 이 자를 붙잡아 심문한 결과 피난민으로 가장한 북괴군 관측군관으로 확인되었고 즉시 처치되었다. 그 후부터 포탄은 대대장으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

나는 7월 초순 2개 소대를 지휘, 미 제 24사단에 배속되어 미군과 수색작전에 참가하며 여러번 사경을 넘었다. 이때 장철부 대대장은 금강 방어작전중 미 제 63 포병대대 B중대가 북괴군에 포위되어 사경을 헤매는 것을 대대장의 직접지휘로 적 400명의 배후를 격파하는 기습작전으로 구출하였으며 이 전공은 미군전사(*페렌바크의 this kind of war 한국전쟁 p119 - 적 보병 400명이 중대진지를 포위하자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이어 어디선가 돌연 나타난 한국군 기병들이 서쪽에서 적의 대열 속에 뛰어든 틈을 타서 중대는 질서있게 후퇴했다.)에 기록되어 있다.

한강방어전에서 금강방어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투를 지휘한 장철부 대대장의 강인불굴(强靭不屈)한 웅자에 기병대대 장병들은 살아있는 군신으로 높이 우러러 보았다.

7월 말 경북 청송으로 이동한 기갑연대는 그 병력이 미약했다. 제 1대대(도보)는 김포전투에서 상실되었고 장갑대대는 각 전선에서 거의 격파되어 4대만이 청송으로 이동했다. 오직 기병대대 200여명의 병력이 기갑연대 주병력이었다. 당시 청송을 공격하던 북괴군은 정예 12사단과 오진우가 지휘하는 766여단이었으며 기병대대는 전투경험이 없는 강원도 제 5전투경찰대를 배속받아 광범위한 청송 전방을 일주일여 방어하였다.

이에 적은 장철부 대대장을 먼저 제거하기 위한 특공대를 경찰대 방어진 일부를 뚫고 침입시켰다. 칠흑 같이 캄캄한 진보리 농가에 있는 대대 지휘소를 포위하고 대대장 생포에 혈안이 되었다. 초병의 사격으로 대대장과 부관, 연락병은 포위망을 돌파하다 부관은 전사하고 중상을 입은 채 권총자결을 한 용맹한 무인의 최후는 비장했다. 30반생을 일기로 조국에 충성한 절세의 애국자 장철부 대대장은 일제말 학병으로 강징되었다가 일군을 탈출하여 항일유격전에 참여하다 황포군관학교 기병과를 졸업하였으며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덕망이 높은 육사 전술학 교관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비록 장철부 대대장은 군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산화했으나 영원한 군의 귀감이 아닐 수없다.


최문호(崔文鎬):6.25당시 기갑연대 6중대 중화기 소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