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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감상(163) '오늘은, 죄없는 사람도' -오늘의 역사-

최길시 2021. 10. 10. 08:53
글쓴이 kilshi 2008-05-16 11:05:17, 조회 : 779

 

 

오늘은

 

We know what we are, but know not what we may be.

(Hamlet 4.5.43)

 

오늘은 이렇지만 내일이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이지요.

(『햄릿』4막5장43행)

 

 

죄없는 사람도

 

Some innocents 'scape not the thunderbolt.

(Antony and Cleopatra 2.5.77)

 

죄없는 사람도 더러는 벼락을 면치 못하는 법이야.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2막5장 77행)

클레오파트라가 차미언에게 한 말

 

 

오늘의 역사

 

1961/05/16

[5ㆍ16 군사정변]

나는, 당시 강원도에서 최다의 학생수를 자랑하던 묵호국민학교에 첫발령을 받고 3-6 담임을 맡아, 교실 부족으로 정규 교실을 반으로 자른 반 칸짜리 교실에 60여명의 학생, 그것도 오전 오후에 2-6과 주인이 바뀌는 오전오후반이 운영되어 그야말로 북새통에 어리버리하던 햇병아리 교사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 반. 5월 16일 화요일. 무슨 혁명이 났단다. 그리고는 공무원들은 ‘재건복’이라는 단체복을 입고, 아침마다 ‘혁명공약’을 낭독하고, 코흘리개 꼬마들 데리고 토요일마다 군대식 내무검열 대비 대청소를 하고, 공직자 술집 출입 금지에, 축첩, 병역미필자들 제재에, 불량배 소탕,……. 아무튼 지금 모두 기억할 수 없다. 그 때 일기라도 좀 자세히 써 두었더라면…….

군대를 가지 않았던 나는 아무 것도 모르니 그렇게 하는 건가 보다 했지만, 군대 갔다 온 선배들은 ‘무슨 이런 세상이 다 있어. 이게 군대지……’ 하며 수군수군 불만이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것이 오늘 이만큼 잘 살게 된 전환의 기틀이었다. 그 땐 지금의 북한보다도 더 못살아, 매년 이맘 때 보릿고개면 굶어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으니까….

 

1995/05/16 옴 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 체포(일본)

[옴진리교]

요약

교주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가 1984년 창설한 옴신선회의 후신으로 종말론을 주장해온 신흥종교단체.

본문

옴은 ‘우주의 창조유지 파괴’를 뜻하는 힌두교의 주어(呪語)로서 주신은 파괴의 신인 힌두교의 시바이다. 신도들에게 신적 권위를 행사해온 아사하라교주는 교리로 ‘절대자유’ 상태인 해탈에 이르기 위해 요가와 티베트의 밀교 의식을 도입한 수행을 쌓을 것과 출가 시 모든 재산을 교단에 기증하고 단체생활할 것을 강요해왔다. 또한 “인류는 세균무기와 핵무기로 최후의 종말을 맞는다”며 “옴진리교 신자들이 1995년 11월 아마겟돈을 극복하고 천년왕국을 영위한다”고 설법해왔다. 이같은 교리에 따라 옴진리교는 이러한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과학기술성’‘자치성’ 등 정부기구를 본뜬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1995년 4월 도쿄 지하철역에서 발생한 독가스테러사건이 아사하라교주의 아마겟돈을 실천하기 위해 교단측이 꾸민 자작극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해 5월 16일 아사하라교주를 체포했다. 옴진리교측은 사린가스는 물론 세균가스와 핵무기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여 온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옴진리교의 신도 대부분은 젊은층이며, 설립 이후 급성장해 일본내 신도수만 1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해외까지 진출, 모스크바와 뉴욕 등 4개 지역에 해외지부를 갖고 있었다. 특히 모스크바 지역은 신도수가 수만 명이나 돼 거꾸로 일본 국내를 향해 선교방송을 하는 일본어 라디오방송과 헬리콥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일본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들으며, 이런 어처구니없는 종교에 많은 사람들(동경대 출신의 엘리트들도 상당수 거기에서 활약하고 있었음)이 빠져 있음을 보고, 우리 인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나약한 존재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1966/05/16 문화대혁명 시작(중국)

[문화대혁명]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66년 5월 4일부터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북경확대회의에서 모택동 주석의 승인을 받은 `5ㆍ16 통지(通知)`를 발표했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게 됐다.

이 통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깃발 아래 학술, 교육, 보도, 문화, 예술, 출판계의 브루조아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해 지도권을 탈취하며 당과 정부, 군대내의 브루조아계급 대표자를 비판해 일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65년 11월10일 4인방중 한명인 요문원이 일간지 `문회보`에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를 발표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것이 그후 10년을 진동시키는 문화대혁명의 봉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