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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100주년의 사천(沙川)국민학교, 내 소년시절을 가다

최길시 2024. 10. 13. 14:40

1. 6·25 사변(事變) 전 강릉경찰서 사천지서와 사천소방서(2층 높이 망대도 있었음) 있던 자리

- 1950년 그해 지서 앞 토끼장에는 순경아저씨들이 사기막에 공비토벌 갔다가 잡았다는 호랑이 새끼 한마리가 있었는데,      주민들의 민원으로 곧 제자리에 놓아주었음. 

 

2. 沙川 德實里 61번지-  내 육신과 꿈이 자라던 집

- 美老里 392번지에서 태어나 첫돌 전에 신축하여 이사온 집(논을 메워 이종대가 대목으로 지었다 함, 치료실과 진찰실을      갖춘 '昌德醫院'이었음). 결혼하여 3개월 동안 신혼살림을 끝으로 강릉시 교동(옛 사단 운동장 한쪽의 전셋방)으로 분가..

- 지붕은 낡았으되 옛 그대로인데, 몸체는 대형 수술로 옛모습 찾을 수 없고, 없던 대문이 철창처럼 굳게 닫혀 있어 안을 들    여다볼 수 없어 아쉬웠음. 덕실로 올라가는 도랑과 둑은 복개되어 큰길이 되고...

 

3. 사천초등학교 교문1. 2.

- 옛날에는 교문1( 우리집 앞)밖에 없었음. 현 교문2 자리엔 박홍철(내 몇 해 후배) 집이 있었고, 그 집과 운동장 사이에 꽤      큰 연못이 있었는데, 주위에 아름드리 수양버드나무가 대여섯그루 서 있어, 운동회 등 행사 때에는 나무 그늘이 휴식터였    음.

 

4.  개교 100주년 기념

 

5. 앞산 그리고 연못

6·25 전 앞산에 올라 본 기억은 전혀 없다. 6·25 후에는 우리들 전쟁놀이터였다. 전쟁통에 학교 앞뒷산이 아군 진지였기       때문에 임시로 구축된 진지 참호 통로가 산 전체에 어지럽게 파헤쳐졌고, 거기에 아군이 쓰다 버린 M1, 칼빈 총탄과 탄       피 탄통 전선줄 박격포탄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 우리들은 그걸 주워 전쟁놀이 장난감으로 삼았다. 위 형들은 나무로       실제로 총알이 나가는 총을 만들어 쏘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  22대 김유진 교장 재직 시 문교부(강원도?) 연구학교로 지정되어, 연못과 앞 뒷산 등 주변 전체가 정비되고 동상 등 여러    시설물들이 들어서 학교 모습이 일신되었는데, 그 후에 관리가 여의치 않았던 모양으로 어수선했다. 그러나 그때의 여러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뱀재로 올라가다 왼편으로 망골로 넘어가는 길은 넓어졌는데,    그길 중간에 학교로 들어가는 길을 철책으로 막혀 있었고, 그 앞 솔밭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가로막고 있어 옛 내 논      은 보러 갈 수 없었다.   .

 

6. 학교 전경

-  아, 얼마나 아담하고 단정한 요람이었던가? 지금은 2층이지만 일제시대 개교할 때 지어진 단층 교사도 저 위치에 저렇게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아름드리 벗나무가 줄지어 있었지.(내 1,2학년, 3학년 6.25때 불타버리기 전) 1학년 학예회 땐가 강     당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로 박영자와 짝이 되어 춤 춘 기억, 키 작은 내가 떨어진 버찌를 주워 먹던 기억, 6.25 때 쌕     쌕이가 날아와 무슨 인민대횐가를 하던 학교를 기총소사하던 기억, 비행기 폭격으로 학교집이 검붉은 연기로 날아가던       걸 앳결 방공호에서 바라보던 기억들이 한 컷씩 선명히 남아 있다.

- 옛날에도 운동회 때면 저 자리가 청군 홍군의 응원터였지. 그때는 커다란 포플러나무 몇 그룬가 서 있어 그늘막이 되었지 

- 학교 남동쪽 연못 한참 옆에 있던 바가지 우물은 고속도로가 나는바람에 묻혀 버렸네.

 

 

7. 교장 관사 

-  일본 개인주택 형태의 단정한 관사가 두 채가 꽤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언제 개축되었는지?. 볼일도 없이 올라가기가 두     려워 멀리서 바라볼 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교장 관사라는데 사람이 기거하지 않는 듯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 또 얼마 세월이 흐르면 세태에 따라 또....

 

8. 뒷산 소나무 그리고 아카시아 

 

- 교장관사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었는데 계단이 생겼네. 6.25 무렵 꼬마들 허벅지 높이였던 보독솔들이 아람드리가    되어 있어  나의 눍음과 함께 소나무들의 우람함으로 세월의 깊이를 느꼈다.  전쟁통에 파였던 참호와 통로의 흔적이 여      전히 남아있어 옛날 여기를 돌아다니며 총탄을 비롯한 전쟁 잔재들을 보물찾기라도 하듯 하던 기억이 새로왔다.  산 위에    서 내다보면 멀리 사천천 너머 석교 판교까지 훤히 내다보이던 것은 소나무 숲에 가려 내다볼 수 없었다. 산 아래 모 심고    벼 베던  학교 논도, 옛날 일제시대 창고 자리와 도살장, 국민학교 중학교 사범학교를 같이 다니고 묵호국민학교에서 같      이 근무한 가장 막역한 친구 김종회 집도 볼 수 없었다.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그 유명했던 반공소년 '이승복'의 동상이 북녘을 노려보며 거기 서 있어 반갑고 놀라웠다. 반공      교육이 열을 올리던 때 전국 대부분 초등학교에 이승복 동상이 세워졌었는데, 빨갱이 잔재 좌파들이 이승복 사건이 날        조된 거짓이라고 선동하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대부분 철거되었는데 여기 이 사천교 뒷산에는 그대로 남아있었네(김유        진교장이 세워놓은 것일 것임). 그 이승복의 형 '이학관'이 그 참살의 현장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내가 근무하던 강릉상고      학생으로 편입되어 들어와(1975 ?) 나는 그로부터 생생히 당시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졸업 후에 좌파들의 여론      에 시달려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세상은 이렇게 바르      게 흘러가지 않기도 하니....   

-  낯선 아카시아 고목이 하나 유물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개교 때부터 있던 게 아닌가?' 등등의 말들이 오가기에 나는            6.25 후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에 사방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사방공사에 주로 심은 나무가 아카시아, 오리나무, 리     기다소나무였는데, 사천학교 뒤편도 사태가 심하여 사방공사를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 그때 심은 나무가 아닐     까 했는데 그건 아닌듯 하지만, 개교 때부터 있던 것도 아닐 듯하였다. 그곳은 내가 번찔나게 오르내리던 길몫이었는데       그때 그렇게 큰 나무가 있었다는 기억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학교에서 재집 우물로 내려가는 곳에 상당히 굵은 나무(지       름 10여cm쯤 되는 아카시아?)가 있었는데 그와 같은 시기에 심어진 나무가 아니었을까? 교장선생님 말로는 그 아카시       아  둥치에 토종벌이 집을짓고 있어 가을쯤에 꿀을 한번 떠 볼까 생각 중이라니.... 나는 그냥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         다.  


 

9. 재집(권혁우씨네), 그리고 그 두레박 우물은...

 

- 주막거리에 유일한 식수원(두레박 우물)이 있었던 재집.(아, 대장간집-강군선-에 펌프 수도가 있었는데 수질이 여기만 못    했던지 모든 마을 사람들, 그리고 학교 애들도 -한때는 학교 애들은 오지 못하게 막은 적도 있었지. 우물이 더러워져-  수      리를 한 듯 지금도 깨끗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어 반갑고 대견했다. 그런데 그 우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아쉬웠다.    이 마을에 옛모습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 아닐까?궝순경 아버지 궝혁우씨는 지방유지였고 진리에서 사업도 하셨      고, 사천학교 사친회장도 한때 했던 분, 자식들도 남편도 떠나고 70년대 초(?)까지도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던 어머니께      내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오래도록 설날 세배를 했던 분.. 

 

 

 

10.  학교

 

-  6.25에 학교가 불타면서 1950년 이전의 모든 기록들이 사라졌을 텐데, -내 학적부 1.2학년(1948,49년) 기록이 공란인 걸     보고 나는, 내가 정식으로 입학한 것이 아니고 2년이나 일찍 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인가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라 6.25 때 모든 기록이 소각되었으므로, 아마도 1950년 이전의 동창회 명부도 없을 것으로 생각됨- 초대에서 8대까     지의  일본인 교장들의 이름까지 올라 있는 것이 놀라웠다.

  - 나는 12대 김종극 교장 때 졸업했지. 1970년대 초,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TV를 보러 저녁마다 엄태남이 소사로 있던 숙      직실로 왔었지. 장욱제와 태현실이 열연한  '여로'를 보려고... 그 속직실 자리에 영혼처럼 서 있는 작은 건물. 지금은 숙        직실이 아니란다.

- 현재 학생은 100명이 안 되어 동창회와 학교가 존폐 걱정을 해야 하는데, 번듯한 체육관 -이 좋은 걸 내년에 개축한단다-    을 비롯해 없는 시설과 자료가 없을 것 같은 아담하고 꽉 차 있는 듯한 학교. 우리 때는 집도 책걸상도 없어 산과 냇가로      떠돌다 초가의 임시 가교사에서 졸업한 것을 생각하면...., 3시가 넘었는데 그때까지도 체육관 도서실 미디어실 에 남아      열중하는 아이들을 보며, 사람은 시대와 장소를 잘 타고 태어나야....   

 

 

 

'언제 실행할 수 있을까?' 을씨년스럽던 버킷리스트 하나 해결했네!

 

아! 이 동해바다와 경포호. 어찌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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