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kilshi [홈페이지] | 2015-10-08 10:06:15, 조회 : 614 |
좋은 시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 Magazine을 읽다 이 시를 보았습니다. ‘그가 그리울 때마다 이 시를 읽습니다’ 라는 표제 아래…….
바람의 말
-마 종 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바람의 말'은 마종기 시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시입니다. 조용필이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로 불러 더욱 친숙합니다. 마종기 시인의 산문집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에 삶과 죽음으로 헤어지면서 이 시를 주고받은 부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폐암으로 죽어가던 남편이 "언제 한번 시간 날 때 읽어보라"며 이 시를 종이에 적어 아내 손에 쥐여줬습니다. 하지만 오랜 병간호에 지친 아내는 무심히 치워뒀다가 남편이 세상을 뜬 뒤 유품을 정리하면서 비로소 시가 적힌 쪽지를 펼쳐 듭니다. 시를 읽은 아내는 울었습니다. 그리고 마종기 시인의 주소를 수소문 끝에 알아내 시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시가 죽은 내 남편을 내 옆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나는 그가 그리울 때면 늘 이 시를 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다가도 내 남편은 내 옆에 다시 와 줍니다. 그리고 나직하게 이 시를 내게 읽어 줍니다. 이 시가 나를 아직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바람의 말'을 처음 읽었을 때, 저도 이 부부처럼 이승과 저승으로 헤어져도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노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마종기 시인을 만나 이 시를 쓰게 된 이유를 물었다가 뜻밖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시인은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연루돼 조사를 받고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아동문학가 마해송)가 1966년 세상을 떠날 때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 회한을 품고 살았지만 미국에서는 의사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러다가 영영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 시를 쓰게 됐답니다. 그러니까 이 시에 나오는 바람은 조국을 떠나 타국 땅을 떠도는 시인 자신이고, 바람의 말은 고향의 그리운 이들과 이별한 채 살아가는 자신의 심경에 대한 토로인 것이지요. 자신은 비록 먼 미국 땅에 있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라며 "부디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시는 시인을 떠나 읽은 이의 마음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마종기 시인은 이 시가 사랑시로 읽히는 것에 대해 "시가 가지는 의미의 다양성이 다이아몬드처럼 시를 빛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게도 영원히 곁에서 지켜주고 싶은 이들이 있습니다. 훗날 제가 떠나더라도 바람이 불 때마다 그들이 저를 곁에 있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끝>
-김태훈의 ‘알콩달콩 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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