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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속의 진흙인형

최길시 2021. 10. 25. 09:51
글쓴이 김명기 [홈페이지] 2013-07-06 09:16:36, 조회 : 1,038

 

 

장마 속의 진흙인형

어지러운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간신히 선잠이 들었다. 흐린 창밖에 새카만 먹물 같은 밤이 흘러내린다. 몇 년 전부터, 이 행성의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게릴라성 호우’ 다. 숲은 냉정한 게릴라들의 차가운 눈빛에 점령되었다.

빗방울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는, 비 피해, 홍수, 이상기온, 인재, 천재, 이재민 등의 반갑지 않은 단어들을 군용 담요 위에 던져지는 화투장처럼 머릿속에 늘어놓는다.

밤새도록 폭우가 쏟아진다. 잠깐 잠깐씩 멈추었나 싶게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여지없이 쏟아 붓는다. 깊은 정글 속. 필사적인 도망자를 좁혀드는 야만인들의 낮은 북소리처럼 울리는 천둥소리. 나는 한 밤중에 눈을 떴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수많은 생각들이 투명한 거미 떼가 되어 빗줄기를 타고 달려든다. 수 억 마리의 조그만 거미들이 지붕을 뚫고, 천정을 뚫고, 마침내 피부와 두개골을 뚫고 대뇌 피질에 직접 쏟아진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윽고 호두 껍질처럼 단단한 시간 속에 봉인되었던 낡은 기억들이, 하나씩 부풀어 오르다 팝콘처럼 터진다. 두려운 어둠 속으로 손을 넣고 감촉만으로 더듬어 담배를 꺼내 물지만, 막무가내다.

라이터를 켜자, 나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던 검은 손들은 멈칫 포위망을 풀고 물러난다. 그러나 끈질긴 기억은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우울하다. 고독하기도 하다. 어느 쪽이 더 짙은 감정일까? 나는 판단을 포기한다. 좀비 같이 어눌한 동작으로 발에 슬리퍼를 끼우고, 화장실로 간다.

어설프게 설치했던 물탱크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갔나 보다. 수도꼭지에서 흙탕물이 나온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샤워를 한다. 어차피 내 몸은 모두 흙으로 만들어 졌고, 흙으로 돌아갈 것인데...

잠깐, 읽고 있던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를 떠올린다.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나의 기억은 이제 너덜너덜한 우산을 닮아간다.

알렉산더가 세상의 끝까지 모두 정복한 뒤, 신이 사는 입구에 이르렀다. 신을 만나고 싶으니, 문을 열라고 고함을 쳤다. (무진장 거만했겠지.) 당황한 신의 문지기들이 나와서 이곳은 인간 세계의 사람이 올 곳이 아니라고 만류한다. 알렉산더는,

‘그러나 나는 지상의 왕이니 뭔가 기념이 될 만한 것을 달라.’ 고 요구한다. 잠시 후 신의 사자는 보물을 들고 온다. 그것은 조그만 구슬이었다.

저울의 한쪽에 구슬을 놓고 다른 쪽에 금덩이를 놓았으나 저울은 구슬 쪽으로 기울었다. 또 다른 금은보화를 Box 채 올려놓았으나, 저울은 구슬 쪽으로 기울어지기만 했다. 알렉산더가 물었다.

“이 구슬은 무엇이냐?”

신의 문지기가 대답한다.

“그것은 사람의 눈알이다. 사람의 눈알은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더욱 교만해지고 더 사치한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눈에 차는 보화 따위는 없는 것이다.”

알렉산더가 신의 문지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 교만한 눈알보다 더 무게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의 문지기는 말없이 구슬에 흙을 조금 뿌렸다. 그러자 곧바로 저울의 수평은 달라졌다. 결국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결국 죽어 흙이 된다는 의미겠지... (까불면 너도 죽여 없애겠다는 일종의 협박도 가미되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가 쭈뼛해 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대충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들어가자, 이런, 비가 샌다. 나는 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망연히 바라본다. 사진이 젖고, 붙여 놓은 시가 젖고, 누추한 기억마저 젖는다. 나는 사진을 몇 장 떼어 내려다가 그만 둔다. 현실보다 더 생생한 사진이 어디에 있으랴. (중년의 가난한 사내가 뒷머리를 몇 번 긁적이고 장면은 암전.)

자연인으로 숲 속에 산다는 것은 그저 낭만만이 아니다. 때로 눈에 쓰고, 혀에 쓰고, 기억에 쓴, 참기 어려운 현실의 생활고가 오래된 벗처럼, 비온 뒤 차창에 붙은 낙엽처럼, N극과 S극처럼, 장부의 차변과 대변처럼 늘 함께 하는 것이다. 미래의 나는 가망 없는 문학을 먹고 죽어갈 것이다.

멀리에서 다시 천둥소리가 낮게 으르렁 거린다. 고독은 조금 더 깊어진다. 막 시작된 장마 속에 하릴없이 방치된 진흙인형의 고독이다.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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