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명기 [홈페이지] | 2011-09-14 22:38:04, 조회 : 992 |
자식자랑
모처럼 택시를 탔다. 버스가 사람을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한다는 핑계였고, 비가 온다는 핑계였다. 택시는 나 같은 유신세대의 아저씨에게는 어쩐지 사치스러운 소비다. 실제로 택시비나 차량 유지비, 유류비 이런 것하고는 무관한 일이다. 고정관념이라는 것.
손님이 없었나? 굉장히 반겨 주는 기사 아저씨다. 이젠 나는 대개의 기사 아저씨들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많은 나이다. 그래도 택시 기사는 늘 기사 아저씨고, 아들이 군에 가 있어도 군인은 군인 아저씨다. 실은 아들 면회 몇 번 가보고 나서야 슬그머니 군인들이 ‘대한의 아들’ 들로 보인다. 진짜 귀여운 애기들이었다.
“어서 오세요!”
“오, 안녕하세요. 굉장히 반겨주시네요.”
“손님이 왕 아닙니까? 잘 모셔야죠. 어디까지 가세요?”
“네. 하남 소방서 앞이요.”
“알겠습니다아.”
이렇게 가볍게 시작한 대화는 어쩐지 슬그머니 택시기사 아저씨의 독백이 되어간다.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흔히 듣는 나이다. 나는 대략 마음의 준비를 한다. 싫어도 들어 주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뭐 그다지 반길 일은 아니지만 좀 참아 주면 된다.
‘우리 아들 녀석은요. 그다지 좋은 대학 안 나왔는데도 돈을 잘 벌어요. 게다가 아주 구두쇠지요. 돈 모으는 게 장난이 아닙니다. 취직 한지 얼마 안됐는데도 벌써 1억 5천 넘게 모았어요. 중소기업 총무부에 갔는데 월급이 한 달에 5백이 넘어요. 짜식이 주식을 하는데 돈을 쏠쏠하게 벌더군요. 여자 친구랑 둘이서 열심히 모으는 모양입니다.“
하하 그거 대단하군요, 정말 대견하시겠어요. 아드님이 돈도 잘 벌고, 모으기도 열심히 하니 얼마나 든든하시겠어요? 나는 그렇게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더 뭐라고 말을 하겠는가? 그렇거나 말거나, 대한민국 평균 급여와 동떨어졌거나 말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 딸년은요. 전문대학 미용관가 뭔가 나왔는데요. 배포가 커요. 버는 족족 다 써버리는데, 이게 한국은 좁다고 중국으로 간 거예요. 가서 식당에 취직을 했는데...”
응? 식당? 식당 서빙 아가씨가 된 건가? 중국에서? 나는 뭔가 앞뒤가 안 맞지만 그렇다고 태클을 걸 일도 아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그게 상책이다.
“근데 이게 거기 식당 주인 아들과 사귀게 된 거예요. 식당 아들이 무슨 명품 가방을 350만 원 짜리를 사줬대요. 350만 원! 내가 이런 미친 X ! 왜 그렇게 비싼 가방을 사달라고 하냐니까, 그게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그 남자가 어느 정도 능력이 되는지 알아보는 거래요. 자기도 이놈저놈 만나다가 딱 끊고 만나주는 거니까, 그 정도는 해줘야 된다고 오히려 당당해요. 곧 그 식당 주인 아들과 결혼해서 식당을 운영하게 될 모양이지 뭡니까?”
아 그거 잘되었네요. 배포가 커서 중국까지 가서 돈 많은 집 아들 잡았으니, 한 걱정 더셨네요. 나는 택시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힐끗 거릴 때마다 이런 식으로 대략 건성건성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뭔가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찝찝함이 있다. 아들은 버는 대로 열심히 모으고, 딸은 버는 족족 써버리면 부모에게는 제대로 하나? 질문이 목구멍에 간질거리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뭐 맞장구 쳐주는데 세금 붙나? 그러나 택시기사 아저씨의 독백은 점점 더 점입가경이다.
“제가 이래 뵈도 모 대기업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십장을 했어요. 십장. 한동안 돈 좀 만졌죠. 신나게 잘 나가다가 실패도 보고, 재기도 하고, 그러다 택시를 하게 됐죠.”
아 그러시군요. 재미 좋으셨네요. 나는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쳐준다. 이미 흥미를 잃었다. 여기까지 신나게 독백을 읊어대던 그가 잠시 이야기를 멈춘다. 홈플러스 하남점 간판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다. 응? 이 사람이 내가 건성으로 대답해서 화가 났나?
“얼마 전 아들놈이 제게 그러더군요. 아버지 제가 돈을 벌어보니 돈 벌기 참 쉽네요. 아버지는 뭐하시느라고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버셨어요? 또 그동안 돈도 못 모으시고 뭐하셨어요?”
또 침묵, 택시는 마침내 하남 소방서 가 보이는 최종 목적지로 천천히 움직인다. 택시기사 아저씨도 나도 말이 없다. 아무리 내가 맞장구를 잘 친다고 해도 이 상황에 뭐라 말 할 것인가? 나도 살아가면서, ‘돈 벌기 쉬운데, 당신은 뭐했냐?’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이윽고 택시가사 아저씨는 결심한 듯 입을 뗀다.
“손님도 자식들 믿지 마세요. 그것들 돈 벌어 봐야 부모에겐 아무 쓰잘때기 없습니다. 지 모으고 지 쓰고, 어디 부모가 뼈 빠지게 벌어 지들 키운 것 알기나 하나요? 돈 잘 버는 자식 치고 효자 없어요.”
아까부터 내게 끈적끈적 다가왔던 미심쩍은 찝찝함은, 택시기사 아저씨의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으로 확실한 형태를 갖추었다.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내 상황도 아니고, 너무나 갑자기, 하남 소방서를 400미터 남겨둔 상황에 너무 급작스러운 반전이라, 뭐라 맞장구 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더 늦기 전에 편안한 표정을 만들며,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말한다. 그런 말씀 마세요. 자식들이 돈 잘 버는 것만도 다행이죠. 돈 못 벌고 나이 들어 부모에게 손 벌리면 그건 어쩌라구요? 그냥 아무 말씀 마시고, 잘한다, 잘한다, 해주세요.
“허허 그런가요? 듣고 보니 그도 그렇네요.”
나는 택시에서 내렸고, 택시는 또 어딘가를 향해 출항했다. 종일 어느 골목인가를 헤매고 마침내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건 또 얼마나 대단한 행복인데. 저 아저씨,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을 싸면서도 불만이네. 어쨌든 내 말이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흠. 그랬으면 좋겠다.
돈 벌기가 이렇게 쉬운데 아버지는 뭘 했냐고? 허허... 굳이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따위의 문자를 들먹이지 않아도, 지난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전쟁의 무서움을 아는 사람이 사라지면, 우리는 또 다시 전쟁을 벌일 거다. 늙은 애비가, 돈 벌어 너 키웠지. 뭘 했겠냐? 이 햇병아리야.
문득 머리 속에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이 떠오른다. 윌리 로우먼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다가오는 겨울, 차가운 거리에서 그가 벌벌 떨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버지 난 보잘 것 없는 놈이라구요.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구요.'
'난,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 당신은 그냥... 열심히 일한 수만 명 중의 흔해빠진 한 사람 일 뿐이라구요."
-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中 / 아서 밀러 -
즈믄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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