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명기 [홈페이지] | 2011-07-31 23:13:28, 조회 : 807 |
비밀
“이젠 알겠어...”
고수부지의 잿빛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서 그가 말했다. 이탈리아 해안을 배경으로 한 영화처럼, 드물게 맑은 날씨여서 햇살을 받은 모든 것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벤치 앞 자전거 도로에는 인라인스케이트, 자전거, 소형 오토바이들이 파리 떼처럼 윙윙거리고 있었다. 마침 도착한 유람선이 유치원 아이들을 꾸역꾸역 쏟아내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탄 자전거 행렬이 그 아이들을 헤치며 위태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 행성에서 아줌마라는 존재는 저렇게 까지 몰염치한 존재일까? 오른 손을 번쩍 든 조그만 아이들 앞에서도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르는군. 그 덩치로 보나, 막무가내인 행동을 보나 정말 돼지가 배워야 할 정도로 저돌적(猪突的)이야.’
잠시 그 자전거 행렬을 멈출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제법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언어가 바람을 타고 조각조각 흩어진 다음에야 간신히 인지할 수 있었다. 응? 뭐라구?
“이젠 대략 알겠다구”
그는 천천히 다시 뱉듯이 말을 꺼냈다. 뭐? 뭘 알겠다는 거지?
“내세라는 것도,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신도 종교도 말짱 거짓이라는 거지. 사람은 한 번 태어나고 그리고 죽어. 그게 전부야. 그 후엔 아무것도 없다구.”
갑자기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는 미지근해져 버린 캔 속의 콜라를 마저 마시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종교인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거야. 그들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 태초의 지도자들은 그 비밀이 밝혀 질까봐 전전긍긍했던 거야. 하늘나라가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누가 목격자야? 아무도 없어. 하지만 새삼스레 부인할 수는 없지. 그러면 그들이 수천 년간 지속해온 사업이 모두 망가지게 되잖아? 어떤 규칙도, 인간을 통제할 절대적인 신성의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인간은 그 순간부터 모조리 족쇄에서 벗어난 악마로 변하겠지. 그러면 누가 우리 스스로를 통제할 건데?”
머릿속에 수많은 인파가 도로를 뛰어다니며 약탈을 하는 그림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그의 말 속에는 단순하지만 손에 잡힐 듯한 그림이 숨겨져 있었다.
"어쩌면 성인들이 종교를 만들어낸 까닭도 알겠어. 그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직도 서로의 살을 뜯어 먹으며 지옥 속을 살고 있겠지.”
나는 그의 뚱딴지같은 의견에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바람이 시원하게 지나가는 벤치에 앉아 스패니얼 종의 개에게 끌려가는 아름다운 아가씨의 전율이 흐르는 종아리를 마음속으로 슬글슬금 쓰다듬다 듣는 이야기치곤 지나치게 심각하군. 나는 콧잔등을 갉작였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바지에 동그랗게 올라앉은 콜라 방울을 튕겨냈다.
“생각해봐. 도덕과 종교가 없다면. 힘센 놈들은 매일 약한 자를 괴롭힐 거야. 냉큼 잡아다가 끓는 물에 삶거나, 커다란 톱이나 길로틴으로 토막 내고, 불태우고, 바늘로 눈알을 후벼 파고, 산채로 배를 갈라 간을 들어내고, 임산부의 태아를 꺼내 구워 먹겠지. 절규하는 인간의 혀를 뽑고, 생가죽을 벗겨 기념으로 간직하고, 고환을 뜯어내어 주머니로 쓸 거야. 결국엔 고통스럽게 죽여서 그 고기를 먹을 거고. 이것도 저것도 다 심심해지면 그때는 사자나 호랑이 또는 개를 불러 뜯어 먹도록 주겠지.”
그가 표현하려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어딘가 문서에 기록된 것들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가 주장하려는 바는 전혀 알지 못하겠다. 테크노 마트를 배경으로 은빛풍선이 하나 둥실거리며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관자형이라는 것을 알아? 사람을 산채로 항문부터 길다란 막대기에 꿰는 거야.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무게로 막대기가 창자를 지나고 폐를 뚫은 다음 쩍 벌린 입으로 빠져 나오는 거지. 인간은 인간을 뜨거운 모래에 생매장하기도 하고, 능지처참하기도 했지. 그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도 표현하지 못했지. 그런 꼴을 당한 사람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으니까. 그 상태라면 죽음이라는 것은 때로 가장 희망적이고 간절한 목표가 되었겠지. 인간이 차라리 죽기를 바랄 때, 그 장소 그 시간이 바로 지옥이야.”
나는 그가 말한 무시무시한 장면이 그려진 문학작품과 역사 서적이 머리 속에서 빠르게 넘어가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장면이 떠오를까봐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가 눈치 챈다면 나로서는 미안한 일이니까, 아주 작게만 흔들었을 것이다. 미간을 찌푸렸을까? 그건 확신할 수 없다.
“결혼이나 사랑이라는 개념 따위도 아예 없어지고 말거야. 남자라면 누구나 즐겁게 여자들을 강간할 것이고, 종족 보전은 그런 식으로 간신히 이루어지겠지. 서로 싸우고 죽이는데 문화는 무슨? 교활한 포식자들이 벌써 가여운 희생자들에게 그런 모든 짓을 저질렀어. 인류는 그런 지옥을 벌써 몇 번이나 겪었지. 멸망과 지옥은 한 문명이 말살 될 때마다 몇 번이고 발현 된 거야. 우리는 이미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옥을 현실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 왔어. 알렉산더, 한니발이 순진한 고대인들을 몇 명이나 죽였을까? 적벽대전에서만 백만 명이 불타거나 익사했지. 테무진이 몇 백만 명이나 땅에 생매장 했는지 알아? 1차 세계대전에서는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었을까? 지루한 참호전에서 발이 썩어 죽은 병사들은 몇 만 명일까? 전쟁 통에 콜레라나 티푸스, 말라리아, 페스트로 죽은 불쌍한 인류는 누가 살해한거지? 남경에서는 몇 명이나 목이 잘린 거야? 역시 전쟁의 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이겠지.”
나는 비키니 군도의 하늘로 솟아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떠올렸다. 귀에서는 터미네이터의 첫 장면에 나오는 음울한 기계음이 단속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눈앞에는 옅은 색의 강물을 배경으로 목이 긴 여인이 자신의 남자친구를 올려다보며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루프트바페의 수투카가 마하의 속도로 강하하며 소이탄을 투하하는 것처럼, 한명 두 명씩 꾸준히 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착실하게 죽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개미에게 살충제를 뿌리듯이 몇 십만 명씩 한꺼번에 증발되어 버리는 거야. 그제서야 인간은 비로소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지. 우리 스스로가 말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거야. 공급되는 인간보다 전쟁으로 소모되어 버리는 인간이 더 많아진다. 그러면 머지않아 인류가 멸종될 수 있다. 그럼 누가 전쟁에 돈을 내는데? 그런 식의 전쟁에는 금전적인 이익이 없어. 폭탄 한 방에 전쟁 끝! 아무도 돈을 벌지 못해. 그때부터 인류는 조금 소극적인 전쟁을 벌였지. 제법 똑똑하게 진화한거야. 돈이 벌리지 않는 전쟁은 조기에 끝날 필요도, 이길 필요도 없다. 투자자들이 벌만큼 벌어야 전쟁이 마무리 되는 거야. 명분도 의미도 없는 냉혹한 비즈니스지. 베트남에서는 인류가 전쟁을 통해 깨달은 것들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어. 이라크를 불사르는 미사일은 어떨까? 가장 경제적으로 목표를 말살하는 기술적인 발전은 무척 인상적이지. 무기상인들이 이익을 위해 대량으로 재고처분을 하는 거야. 재래식 무기 바겐세일! 그런 이유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채 불타는 고깃덩이가 되는 거야. 우리는 T.V. 중계로 그걸 보면서 럭비경기라도 보는 것처럼 환호하고. 그러니까 일부 종교에서 보여주는 지옥도는 결코 상상화가 아니야. 오히려 세밀함이 많이 모자라는 정밀 묘사라구.”
나는 단테의 신곡과 사찰의 탱화가 재빨리 머리 속을 뛰어다니는 것을 도무지 걷잡을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내 마음 속의 죄악이 두려워하던 장면. 그리고 내 죄악들을 더 선명하게 만들던 이미지.
“결국 지옥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도덕이 사라지면 곧바로 이 현실에 강림하는 거야. 성인들은 그게 두려워 종교를 만들고, 지옥이 현실에 펼쳐지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서 막았던 거지. 그러니까, 돈을 내라고 하는 거야. 현실에 지옥이 나타난 다음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몇 푼씩 모아 종교인들을 먹여 살리고, 그들에게 도덕과 종교를 자꾸만 생산하게 만드는 거야. 장마를 대비하여 만드는 작은 모래 포대처럼.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협박과 위협으로 사람들을 잠잠하게 만들어서 그들의 야성을 억눌러야만 하지. 그게 우리가 생존해 있는 동안 지옥문을 막는 최후의 보루니까.”
신이나 종교인들의 신통력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협박과 위협으로 사람들을 잠잠하게 만들어서 더 이상 난폭하지 못하게 만든다구? 그러면 지옥문이 닫힌단 말이야?
“그래. 어쩌면 독재자들은 이미 그걸 알고 있었을 거야. 그들은 최고의 자리에 취임하자마자 우리 인류가 알고 싶은 비밀이 담긴 문서들을 모조리 읽어 보았겠지. 너 같으면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힘을 가진 자리에서 그동안 평생을 지녀왔던 궁금증을 풀고 싶지 않겠어? 우주는 어떻게 생성된 걸까? 달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모아이는 누가 만들었을까? 히틀러는 과연 자살한 것일까? 케네디는 누가 죽였을까? 박정희는 어떤 알력으로 살해 되었을까? 외계인은 있는 것일까? U.F.O는? 우리를 늘 지켜보는 절대 선이나 신은?”
그런 일들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 내가 왜 그런 일에 연관이 되어야 하지? 나는 그가 알지 못하게 주머니를 뒤적이며 오늘 저녁에 먹을 소주 값이 없다는 것에 절망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소극적인 의미로 충분히 지옥이라구.
“결국 독재자들도 과거와 미래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거지. 그러니 그들이 일회성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어? 고삐가 풀린 망아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려야겠지. 그러려면 자신의 기반과 지지 세력과 석유가 필요하지. 그들은 남은 삶 동안 최대한 끌어 모을 거야. 자기 다음에도 또 누군가가 그 모래성을 지켜야 하겠지. 자신에 남겨진 유일한 것들, 가족 명성... 그런 것들이라도 남아야 할 것 아니겠어? 그러니 그들은 자신 있게 무자비 해 질 수 있는 거야. 앞으로 탄생할 모든 독재자들도 지난 세기의 영웅들처럼 사람을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오래 동안 이름이 남을 것을 믿고 있겠지. 네가 아무리 무관심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그 독재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너를 전쟁터를 끌어내 네이팜탄으로 새카맣게 태워죽일 거라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제정신이야?
“그래 나는 제정신이야. 그러니까, 이젠 알겠다구. 역시 과거와 미래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맞아 내일부터는 좀더 정성을 들여 살아야겠어. 나를 무의미한 먼지로 두지 않고, 매일 현실적으로 꾸역꾸역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결국 나 자신 뿐이니까.”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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