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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최길시 2021. 10. 17. 13:32
글쓴이 김명기 [홈페이지] 2010-12-20 20:14:30, 조회 : 2,363

 

 

시인의 사랑.

라이너 쿤체. 그는 시인이다. 이 행성에 자유가 꽃 피기 직전, 길고 긴 압제와 억압의 터널을 통과하였던 한 많은 늙은 시인이다. 그가 지구의 절반을 돌아 자신의 시를 사랑하고 애송하고 있는 몇 몇 사람들에게, 직접 낭송해 주겠다고 자비를 들여 낯선 한국을 찾았다. 서울대학교의 시청각 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어려운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이 늘 그렇듯, 오히려 쾌활하게 농담을 하며 미소 지었다.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자신의 시를 낭송해주었지만, 독문학과 전영애 교수의 명쾌한 번역이 없었다면 그저 나흐, 우흐, 하는 비음 섞인 독일어의 거친 발음조각 뿐이었을 것이다.

낭송이 끝나자 한 학생이 일어났다. 그는 노시인에게 말했다.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 저자의 허락도 없이 당신의 시를 연애편지에 인용하였습니다.”

노 시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이렇게 물었다.

“결과는 어땠나요?”

주위에 웃음이 흘러 넘쳤다. 그러나 그 학생은 결말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21세기, 이 배금주의 행성에 발생한 사랑치고 변변한 것이 있을라구. 나는 지레 짐작을 하며 사랑이 주는 고통이 잠시 심장 근처에 머물다 가는 것을 느꼈다. 그 학생은 다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자 노 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목을 고르고 난 뒤, 느리고 찬찬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마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나 역시 노시인처럼 비민주적인 시대를 살아낸 것이다.

“나는 동베를린 사람입니다. 정부에 의한 엄격한 통제와 검열의 시기였지요. 나의 일거수일투족,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모두 누군가에 의하여 관찰되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내 온몸에 붕대를 감고 체취까지도 채집해 두었습니다. 내가 어디론가 자유의 세계로 탈출하려면, 잘 훈련받은 도베르만 개들이 나를 찾고 물어뜯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결과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세밀하게 잘 만들어진 개인 기록을 가진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청각 실을 메운 학생들의 호흡이 느려지고 조용해졌다. 뭐지? 이게 사랑이야기에 대한 답변인가? 이윽고 노 시인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곧바로 열쇠제작공의 보조원으로 배치되어 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부의 지시지요. 형편없는 급여와, 형편없는 생활환경과, 현실적인 좌절의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의 지식인들은 상상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시를 썼습니다. 어느 날 나의 시가 서베를린 라디오에서 방송되었습니다.”

재스민 차 한 잔으로의 초대 EINLADUNG ZU EINER TASSE JASMINTEE

들어오세요, 당신의 슬픔을 Treten Sie ein, legen Sie ihre
내려놓으세요, 여기서 traurugkeit ab, hier
당신은 침묵할 수 있습니다. duerfen Sie schweigen

“곧바로 정부의 감시와 통제는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편지였습니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독일어 문장으로 쓰여 진 편지였습니다.”

시청각 실은 좌중들의 침 삼키는 소리와, 노시인의 허공을 가로지르는 손동작에서 나는 바람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라이너 쿤체. 그의 떨리는 음성만이 모젤 와인처럼 부드럽게 공간에 채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였습니다. 그녀는 선반공의 1/3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고 있었습니다. 체코역시 지식인들이 혹독하게 탄압받던 시기였습니다. 그녀의 편지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출발해서 서베를린, 동베를린, 정부와 검열관들을 통과해서 3개월 만에 제게 도착했습니다. 그 편지는 틀림없이 기적의 손을 빌려 제 손에 쥐어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후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아마 400통쯤 될 것입니다. 어떤 편지는 26장이 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과연 노시인의 이런 이야기가 초고속 시대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유신시대를 겪은 나는, 초등학교시절 대학에서 데모를 하다가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몽땅 뽑혔다는 뒷집 형님의 이야기와, 언젠가 골목길에서 마주친 그의 헤벌어진 입을 떠올렸다. 아무리 흘러갔고, 그래서 그리운 시절이라고 해도 분명하게 지독한 독재의 시대였다.

“그녀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궁금했습니다.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내게 보낸 사진은 그녀의 16살 때 사진이었습니다. 체코에는 종이와 인화지가 없어서 그 이후의 사진은 전혀 없었습니다. 극작가였던 그녀의 오빠가 장난기를 발동하여 낡은 라이카로 찍어준 그 사진은 그녀가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녀의 실제 얼굴을 거의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그렇게 밝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좋았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편지에 썼습니다. 실은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학생들의 몸이 앞으로 7도 가량 숙여진 것을 보고, 나는 다행히 이들이 노시인의 부드러운 독일어 억양에 빨려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내겐 전화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도 전화는 없었지요. 두 공산주의 국가 간의 사적인 통화란 그 당시 상상조차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편지로 약속한 날, 나는 퇴근 후 곧바로 전화가 있는 친구의 집에 가서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11시가 넘자, 친구의 아내가 말했습니다. 저는 먼저 자야겠어요. 새벽 1시가 넘자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나도 가서 자야겠네. 내일 일이 많거든. 그러나 저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걸려올지 오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는 전화를 말입니다. 마침내 새벽 3시 30분에 전화가 울렸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제 시청각 실은 진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노시인은 어눌하고 떨리고 느린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지만, 실내의 모든 시선과 마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오른 손으로 바꾸었다. 학생들의 시선은 노시인의 이마쯤에 멈추어 있었다.

“나는 말했습니다. 당신이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까? 멀고 먼 전화기의 다른 한 쪽에 매달린 안타까운 입술에서는, 그래요. 제가 바로 그녀랍니다. 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나는 즉시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나와 결혼해 주겠소? 잠시 호흡이 멈추는 순간이 지났습니다. 물론 나도 압니다.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고, 편지만 주고받다가 처음으로 통화하는 순간 청혼을 하는 남자라니. 정신 나간 짓이었지요. 하지만 우리가 또다시 통화를 하게 될지 어떨지는 기약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실낱같은 희망과 기적으로 이어져 가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내 평생 단 한번만이라도 그녀에게 직접 묻고 싶었지요. 심장이 멎는 듯한 순간이 지나고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네 그래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순간 시청각실 내의 모든 학생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학생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잠시 후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그는 다시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 후 처음으로 만난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여러분 나의 아내를 소개합니다.”

그의 소개로 좌석의 제일 앞줄에서 짙은 갈색머리의 할머니가 일어섰다. 노 시인의 행복. 노시인의 사랑. 라이너 쿤체의 전부. 그의 아내였다. 그 순간 학생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눈시울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이런 장소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중년의 내가 눈물을 흘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질문의 시간이 돌아 왔을 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이젠 핸드폰에, 디지털 카메라에, 인터넷에, 서로를 이어주는 있는 문명의 이기가 이토록 많은데도 사랑도 이별도 게임처럼 쉽게 하는 요사이 젊음들의 사랑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가벼움에 대한 토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것은 부질없는 질문이 될 것이다. 노 시인이나, 중년의 나 역시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의 사랑 법으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를 것이다. 그러니 이미 밀려난 우리가 서로 때늦은 질문을 주고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이 풍요로운 시대의 젊은이들이, 지난 결핍된 시대의 애처롭고, 안타깝고, 지독하고 끈질긴 사랑은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진짜배기 사랑은 이미 백악기의 공룡과 함께 멸종되었다. 그러니까 노시인과 그의 부인은 금세기 최후의, 살아있는 사랑의 화석인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열음사에서 손해를 예상하면서도, 전영애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300부만 찍었다는 그의 새 시집을 사서 손으로 쓰다듬고 있을 때, 아우가 내게 물었다.

“형, 쿤체 시인의 사인 안 받으세요?”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이미 심장에 사인을 받았는데, 무슨 사인을 또 받아?”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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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윗 사진은 쿤체 시인의 아내, 아래 사진은 라이너 쿤체 시인과 전영애 교수님.
그는 아내를 위해 당부, 그대발치에 라는 시도 썼다.

[당부, 그대발치에]

나보다 일찍 죽어요,
조금만 일찍

당신이
집으로 오는 길에
혼자와야하지 않도록

- 라이너 쿤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