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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김종해-

최길시 2021. 10. 11. 12:27
글쓴이 kilshi 2008-11-01 17:23:07, 조회 : 806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35]>

 

바람 부는 날

김 종 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1990년>

 

(해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일이 괴로운 일이라 하고 어떤 이는 한없는 기쁨이라 한다. 어떤 이는 사랑 받는 것이 행복이라 하고 어떤 이는 받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라 한다. 어떤 이는 사랑은 불어닥치는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봉변 같은 것이라 한다. 모두 맞는 듯 틀리는 것이 정답인, 너무 어두운 한밤이고 너무 밝은 한낮인 사랑. 너무 추운 여름이거나 너무 더운 겨울과 같은 사랑.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은 한없이 깊은 오지(奧地)라는 것! 나만이 겨우겨우 찾아갈 수 있는, 나밖에 모르는 장소! 아무리 드러내 놓아도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오묘한 것. 사람들이여! 남의 사랑에 대해 운운하지 말자. 그 오지에 대해.

 

이 시의 주인은 지금 괴롭다. 보고 싶은 마음, 기다림의 심정이 행복의 파동을 끊임없이 일으키는데 정작 볼 수 없고, 보아서는 안 되고, 서로의 마음이 어긋난다면 주체할 수 없이 괴로워진다. 이 사랑의 주인은 지금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어'라고 후회하기 직전이다. 괴로움을 주체할 수 없어 지하철을 탄다. '어둠뿐'이고 '외줄기'이고 '일방통행의 외길'인 지하철이다. 그 수단이 지하철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저 지하 깊숙한 길, 창 밖으론 아무것도 없는, 오직 어둠과 전진뿐인 길, 밖에서는 그 누구 하나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길이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지하철이며 역도 하나뿐인,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가는 지하철이다. 그 길은 과연 괴로운 길일까? 천만에. 그 길 주위가 어둠뿐이긴 하여도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을 하나 갖고서' 가는 길이다.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한 혼자만의 길인가. 모든 것 잊고 시름도 잊고 그저 당신만을 바라보며, 이미 당신과 함께 하고 있는 길인 것이다. 늘 한 사람만이 내리는, 그가 손님이며 역장이고 검표원일 숨은 역이 어디쯤인지 궁금하다. 그런 역 하나 갖고 싶기도 하다.

 

"나는 사시사철이 봄날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다. 사시사철이 봄날이 아닌 곳에서 나는 봄날을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노래로 쓰고 싶다"(〈누구에게나 봄날은 온다〉)라며 오랜 세월 시 쓰기의 입장을 정리해 밝힌 김종해 시인(67)은 사랑의 탄환이 되고 싶은, 사랑의 갈급한 마음 또한 대신하여 이렇게 격정으로 노래한 바 있다. "내가 만약 당신을 조준하여 날아간다면/ 날아가서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다면/ 가 닿아서 함께 불덩이로 흩어진다면/ 흩어져서 한순간이 영원으로 치솟는다면/ 나는 미련을 갖지 않으리/(…)'(〈탄환〉). '지하철'과 '탄환', 전혀 다른 듯 사랑의 핵심과 닮아 있지 않은가.

 

 

   서서히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11월입니다. 더구나 생활에 주름이 잡혀야 하는 요즘이고 보면 왠지 한 해라는 것이 착잡해집니다. 1949년 11월 1일에는 서울-부산간 민간항공이 취항(운임 1만100원)하였고, 1908년 11월 1일에는 한국의 첫 월간 잡지 `소년` 첫 발행되어 새 시대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가슴이 부풀었을 텐데…….

  1908년 11월 1일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창간호 독자는 6명, 2호는 14명에 불과했고 1년이 지나도록 200명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소년`은 최남선을 중심으로 이광수 홍명희 등이 필자로 참여한 당시 최고의 잡지였다.

   그러나 `소년` 창간호는 이보다 훨씬 중요한 문학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여기 실린 최남선 자신의 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통해 도도한 서세동점(西勢東漸), 제국주의 침략의 암운 속에 새 세기의 새벽을 맞는 한국인 의식의 주소를 밝힌 것이다. 최초의 신체시로 불리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소년`의 권두시였다.

18세의 천재소년 육당은 바다를 빌려, 새 시대의 주역인 ‘소년’은 힘차고 두려움을 몰라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시선이 대륙을 떠나 바다로 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 ‘바다’는 문명 개화를 통해 도달하고 싶은 동경의 공간을 의미한다.

   내용면에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근대적인 자아의식이나 미의식을 개척하지 못하고 `계몽주의`에 머물고 말았지만, 형태나 표현상에 있어서의 시도가 근대시로의 출발점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신체시라는 시사적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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