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이병철 | 2006-03-01 15:29:48, 조회 : 1,862 |
대여섯살 된 한 꼬마가 있다. 뒷산이 울창하고 사립문밖으로 들판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오늘은 비가 내려 밖에
나가 놀 수도 없고 외할아버니 외할머니는 밭에 일도 쉬시고 주무시고 계신다. 꼬마는 너무 심심했다. 처마끝
양철물받이로 흘러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너무 크고 처량했다. 밖에 나갈려고 하다가 또 되돌아왔다. 빗줄기가
너무 굵었다. 앞 집에 친구는 누나가 둘이나 있어서 참 좋겠다. 또 맑은 날 동네 형, 친구와 놀다보면 이따금씩
외톨이가 돼 혼자 돌아왔다. 이 꼬마에겐 외할머니가 어머니였다. 작년에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아버지는 돈을 벌러
멀리 가셨고 농촌 시골집에서 외조부모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다.
얼마만에 아버지가 집에 들르셨다 다시 가시고, 그렇지만 제일 좋을 때는 이제 갓 사회에 나가 은행에 다니는 아저씨가
들를 때다. 그럴땐 앞집 친구와 옆동네 형들도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그 후로 학교에 다니면서 외할머니와 같이 읍내로
나왔다. 외할머니는 은행에 다니는 아저씨 밥도 해주고 또 소년의 공부도 시켜야 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애미도 없는
것이, 너는 잘돼야 한다. 착하고 반듯하게". 이따금씩 탄식과 함께 하시는 말인데, 소년의 귀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
한번은 소년이 열병에 걸려 앓아 누울때 밤새 간호해 준 분은 외할머니였고, 학교갈때 숙제고 연필이고 점심까지
싸주는 분도 역시 외할머니였다. 허리도 꾸부정하고 몸도 야원 분이였는데, 그렇게 소년의 뒷바라지를 해줬다.
소년은 그 고마움을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새어머니가 들어오셨지만
학교때문에, 아버지 직장때문에 소년은 열살될때까지 외할머니 손에 컸다. 그러다가 드디어 헤어져 아버지 곁으로
갈때는 왠지 모르게 슬프고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차창밖으로 산중턱을 돌고도는 길이 마치 첩첩산중에 갇히듯
답답했다. 왜 그랬는지? 그땐 미처 몰랐지만, 그 뒤 나이를 더 먹고 나서야 알았다. 아! 외할머니가 나를 무척 아끼셨고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셨구나! 그래서 그때 내 마음이 그렇게 슬펐고 우울했었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불혹. 한 집안의 가장이자, 회사에 나가면 10년을 더 넘긴 중견고참이지만, 아직도 그 애틋한
추억이 마음속 깊이 아련히 남아 눈시울을 적신다.
지금 그 외할머니는 올해 춘추 91세로 시골 양로원에서 살고 계시며, 이 불혹의 남자가 가족들과 찾아갈때마다
그 이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남자는 세상을 착하고 반듯하고 약한 사람을 도우며 살리라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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