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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의 변

최길시 2021. 10. 30. 11:43
글쓴이 kilshi [홈페이지] 2021-06-24 08:37:56, 조회 : 164

 

 

벼루의 변

 

가지런히 누워있는 벼루들은 한결같이 묵묵히 말이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도 없는 갈림을 견디면서 안으로 안으로 켜켜이 쌓아두었을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우리 세대의 주 필기구는 심에 침을 발라야 잘 써지는 연필과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책가방은 대부분 엎질러진 잉크로 얼룩져 있기 마련이었다. 만년필이 있었지만 웬만해선 가져보기 어려운 고급 물건이었다. 그 이전에는 먹을 갈아 붓으로 글을 쓰고 기록했던 모양으로, 우리 국민학교 때까지도 습자시간이라는 게 있어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 신문지를 구하느라, 무거운 벼루를 들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에 귀찮게 느껴졌고 별로 재주도 없어보여 대충 지났었던 것 같다. 후에 글씨를 잘 써야하는 업무 때문이기도 하고, 붓글씨를 일필휘지로 멋지게 써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 적이 있어서 서예학원을 몇 번 드나들며 벼루와 가까이해 본 적이 있었지만 조급함과 자조감이 생겨 얼마 이어가지 못하고 중단하는 바람에 벼루와의 연도 길지 못했었다. 나중에 보니 글씨에 그렇게 소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무겁고 투박스럽던 벼루가 언제 무슨 이유에선가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하고싶은 말을 잔뜩 품고 있으면서,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하면서 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때때로 박물관에 전시된 벼루 앞에서 한참씩 들여다 보곤 하였고, 삶의 한 폭이 될 텃밭은 아니더라도 마음바닥에 앉혀둘 사랑스런 벼루밭 하나쯤 갖고 싶었다. 홍콩에서는 벼루 매장에 정말 마음이 빠져드는 벼루가 있었는데 도무지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어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나 늘 마음 구석엔 벼루의 변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웅크리고 있었다.

며칠 전, ‘연벽묵치 인생…… 반백년 모은 벼루 1,000여점기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기회 다시 또 있으랴! 마스크 단단히 하고,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무슨 일인가 한숨이 나왔다. 조심스럽게 하나씩 다가갔지만, 어떤 것은 근엄한 기품으로 또 어떤 것은 정갈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으면서도 입은 한결같이 굳게 다문 채 말이 없다. 돌다보니 살짝 벌어진 입이 어쩌면 열릴 듯 열릴 듯한 것이 있어, 1,2층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문득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무슨 일에도 침묵하라

마지막 순간까지 갈고닦으라.

 

그리고,

삶을 안달하지 마라.

가나아트센터의 문을 나섰다.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가파르게 느껴져 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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