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kilshi [홈페이지] | 2015-11-21 07:20:49, 조회 : 646 |
철원에서
김창립(金昌立)
첫겨울 찾아오는 음력 10월 초
북쪽의 철원으로 거처 옮겼네.
우리 집은 북쪽이 넓게 펼쳐져
저 멀리로 궁예의 궁터 보이는데
성곽은 황량하게 숲을 이루고
옛 궁궐은 사람 없는 폐허 되었네.
슬픈 노래 부르며 검 어루만지고
강개한 기분 되어 책 덮어버리네.
鐵原
孟冬十月初(맹동십월초)
北遷鐵原居(북천철원거)
我家背北寬(아가배북관)
遙望弓王墟(요망궁왕허)
城郭爲荒林(성곽위황림)
古闕無人虛(고궐무인허)
悲歌撫我劍(비가무아검)
慷慨爲廢書(강개위폐서)
17세기 말엽의 소년 시인 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1666~1683)이 13세에 지었다. 시를 잘 지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좌의정으로 재직하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유배를 당해 전라도 영암에 머물다가 1678년 9월 강원도 철원으로 옮겨왔다. 김창립도 따라와서 집을 정하고 보니 말로만 듣던 궁예도성이 바로 집 뒤에 펼쳐져 있다. 음산한 초겨울 날씨에 궁터를 바라보니 성곽은 황량하게 숲으로 바뀌어 있고, 궁궐터는 사람 하나 살지 않는 폐허로 남아 있다. 역사의 폐허를 눈으로 보며 집안의 고난을 떠올리니 소년의 가슴은 비분강개함으로 뭉클해져 손이 자꾸만 검으로 간다. 지금도 비무장지대 숲에 황량하게 방치된 궁예도성의 쓸쓸함과 겹쳐진다.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한시’에서-
나도 철원에 딱 일 년 한 달을 살았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역사시간에 궁예를 배울 때, 6.26전쟁 얘기에서 철원전투를 들은 것 외에 철원을 듣거나 생각하거나 한 적이 한번도 없는 철원을, 그야말로 사고무친한 철원을, 평생을 강릉에서 살다 강릉에 묻히리라 마음먹었던 강릉을 떠나면서 내가 택한 이유는, 오직 서울로 옯겨놓은 가족과 가장 가깝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 그렇다. 그때 철원고는 접적지역 학교여서 근무평가에 점수가 있긴 하였다.
어딘가에서도 쓴 적이 있었지만, 2월말의 일요일, 강릉에서 춘천, 춘천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철원 터미널에 내렸을 때, 양손에 이불보따리와 책보따리 하나를 달랑 들고 섰는 내모습에, 황량한 느낌의 싸늘한 거리를 휘감고 가는 찬바람에 처량함마저 돌았다. 그러나 내가 겪고 가야할 곳이었다. 적어도 3년은 여기서 겪어야 할 것이었다.
힘든 1년이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그런데 그곳에 먼저와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이제나 저제나 서울쪽으로 발령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고 뜻밖에 강릉고에 같이 있던 사람도 있었다. 토요일이면 수업 끝나기 무섭게 터미널로 달려갔다가 월요일 새벽차로 돌아오는 생활이었다.
가르치는것에는 보람도 있었다. 세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깨워준다는...
그러다가 행운이었던지, 운명이었던지 서울에 갈 자리가 나타나 몇 년씩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앞질러 서울로 가게 된 것이다. 가면서 1학년을 담임하여 3학년 졸업을 시키면 가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서울로 간 이후에 내 길은 그야말로 마음먹은 대로 열렸다. 아마 그때 철원의 1년이 아니었더라면 전혀 다른 내인생이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감탄한다.
지금도 그 철원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해 오는 건... 그 때문에 그때 하숙집과 학교 서울밖에 몰랐었던 철원을, 동송거리와 하숙집과-집들이 모두 신축이 되어 끝내 찾지 못했지만- 학교와 노동당사와 ... 를 혼자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시지 않는 이 미련이랄까 아쉬움이랄까 그런 알 수 없는 것이 남아있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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