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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 마음으로 선생님께 올립니다.

최길시 2021. 9. 28. 18:05
글쓴이 송현우 2005-10-04 22:51:22, 조회 : 2,452

 

선생님, 송현우입니다.

뜻밖에 옛 은사님의 전화를 받아 몸 둘 바를 몰랐고, 또 불쑥 이렇게 자판을 두드려 안부를 여쭈니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어디어디 계신다더라, 누구누구 안부를 물으시더라, 어찌어찌 지내신다더라...... 전해오는 말씀은 귀로 들었습니다만, 그리 성실하지도 못한 삶, 쫒기는 경황도 아니었을 텐데 무성의로 일관하였습니다. 늘 최선을 다하시는 선생님의 모습과 가르침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제자이기에 어쩌면, 그래서 더욱 찾아뵙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면 더 궁색한 변명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건강하시지요? 여전히 열정적이시고 ‘정정’하신 전화목소리를 듣고 고향 부모님 건강하신 듯 감사하고 반가웠습니다. 길러내신 제자들 한둘이 아닐 터인데, 기억 되살리시며 ‘소식 궁금한 너희 동기들 있다, 있다’ 하실 때에는, 옛적에 수 백리 출가한 딸아이 살림 걱정하시는 듯 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어제 개천절에, 아내와 네 살 먹은 아들과 함께 복원된 청계천엘 다녀왔습니다. 상전이 벽해된 그 ‘기적’을 보면서, 이십여 년 전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서신의 한 구절 - 삽으로 산을 옮겨 평지를 만들고 물길을 내는 한 노인의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리(아들 녀석의 애칭입니다)가 서울서 자라면 여기서 데이트 꽤나 하겠군’, 아내에게 실없는 소리 한마디 하면서 혼자 웃었습니다.

아마, 청계천 복원은 뚝심과 자본과 행정력의 작품일 수는 있겠으나 시간과, 시간이 밴 집념과, 집념이 어린 노력과, 노력을 지속하는 인내가 그 속에 없기에 ‘또리가 크면......’이라는 생뚱맞은 ‘세월 타령’이 나온 듯 합니다. 그렇게 보면, 청계천은 ‘기적’이 아니라 ‘상전벽해의 현장’에 불과하고 그 ‘노인’의 한 삽 한 삽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이겠지요.

청계천 따라 걷다가 종각길로 접어들어 자연스레 교보엘 갔습니다. 가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행복을 얻은 공부이야기’를 샀습니다. 교보문고 149번 코너 하단에 오롯이 꽂혀있더군요. 아내는 무슨무슨 ‘천재소년 유근이 아빠가 쓴.....’ 이런 책인가 하다가, ‘무슨 책이야?’, 시큰둥하다가, ‘최길시 선생님 책이야’ 했더니 놀라더군요. ‘아, 그 최길시 선생님 말이야?’ 하고요.

선생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 중에 ‘나중에 꼭 수필집을 하나 내고 싶다’라던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꼭 그리 하시리라 믿고 있었기에 언제인가 언제인가 하고 있었는데, 전화통화 후 혹시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웬걸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습니다, 또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했던 ‘최고!’의 국어시간, 선생님과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들, 선생님과(일본 친구분도) 하루 묵었던 동해호텔, 선생님 전근가실 때 마지막 인사드렸던 지하다방,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편지들, 대입시험 후 봉석이(장봉석, 몽고 처자와 결혼해서 서울에서 애 둘 낳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와 함께 찾아뵈었던 개포동 자택...... 모두모두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책, ‘...공부 이야기’, 어젯밤 우선은 ‘휘리릭’ 보았습니다만, 앞으로 한 장 한 장 커다란 공부거리로 삼겠습니다. 앞으로 한 번 두 번 찾아뵈면서 또 감사한 추억들이 많이 쌓이겠지만, 혼자 조용히 책장을 넘기면서 노년의 은사님 말씀을 활자로 만나는 것도 선생님께서 주시는 큰 선물입니다.

젊은 날 열정이 아직도 여여하여, 낼 모레 정년이 어색하다는 선생님 글을 보았습니다. 혹, ‘노년의 은사님’이라는 말씀에 언짢으신 것은 아니시죠?(이 말씀 후엔 ‘이모티콘’을 붙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 합니다. ^^;;) 정년은 ‘법정’ 정년일 뿐, 전혀 은퇴는 아니시란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근황 - 직장생활, 가정생활, 앞으로의 계획 등을 말씀드리는 것은 첫 안부 여쭘에 주절거림이라 여겨져, 다음에 뵙거나 또 다른 서신으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오늘 태연이와 통화를 했는데, 11일 이후 20일 사이에 학교로 찾아뵙기로 대략 정했다고 합니다.

태연이 저의 일정을 핑계대는 듯이 친구들에게 공지하여, 저는 저대로 손사래치며 왜 나에게 맞추느냐 내가 맞추어야지, 하고 강한 ‘항의’을 했더니, 태연 왈, 다른 친구들도 조금 일찍 퇴근하려면 그렇게만 시간들이 맞는다고 싱거운 소릴 하더군요.

선생님, 그러면 단풍이 조용히 익어가는 10월 셋째, 넷째 주에 뵙겠습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들 하는데, 이렇게 저희 앞에 큰 어른으로 서계셔서 참 감사합니다, 선생님.

2005. 10. 4.

송현우 올림.

* 추신 : 오늘 직장에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바로 ‘천사데이(1004day)’야, 했더니 천사데이엔 뭘 하는 건데요? 묻길래 제 마음대로 천사데이 만들어 놓고는 대답이 궁했습니다. 뭘 하든지 천사데이라는 것만 알고 하면 돼, 하고 싱겁게 방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2005년 천사데이에 존경하는 선생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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