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명기 [홈페이지] | 2011-07-17 06:44:56, 조회 : 860 |
아침안개
안개가 가득한 아침을 맞고 있다. 도시의 삶을 떠난 뒤로, 장마철 이라는 시간은 그저 TV에서 말하는 호우주의보와, 스포츠 중계를 닮은 ‘들뜬 비 피해’가 아니다. 몇 날 며칠이고 멈출 줄 모르는 짙은 안개와, 간간히 쏟아지다가 세상을 드럼처럼 신나게 내리치는 소나기, 한 밤 잠결에 기적소리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과 번개, 온통 끈끈한 피부와 퀴퀴한 냄새의 덜 마른 옷가지들, 밖을 드나들 적마다 물로 흙을 닦아야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음습하게 피어나는 잿빛 곰팡이들의 진지한 세계다.
아우들이 찾아 왔다. 대학교 2학년, 젊고 푸른 그들... 그들은 늘 자신의 꿈을 과시하고 자신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불안한 것이다. 아직은 식지 않은 마그마처럼 불안정한 그들이 딛고 선 현실이라는 발밑. 그들은 빠르게 흘러가는 유빙 위에 서 있는 외로운 펭귄처럼,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기다려볼 것인가? 생명을 담보로 헤엄을 쳐서 다시 거대한 남극의 얼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나 역시 그들처럼, 따스한 둥지에서 날아오르기 전, 멋지게 비상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이 세상이라는 나무의 까마득한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인가? 그 불안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경험이 있는 것이다.
"형님 한 잔하세요."
"그래."
“보시기에, 저 잘 살고 있는 것인가요?”
“아니 비틀 비틀, 여기저기 꽈당! 이지. 그래도 너 나이 때는 그래야 돼. 그게 정상이고 그 상처들이 남긴 흔적이 바로 너야”
피로한 나는 잠들지 못한다. 현명하지 못한 나는 충고하지 못한다. 그저 그 시절 내가 겪었던 몇 가지 어리석은 선택들에 의하여 생겨난 빛바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그 속에 교훈이 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리저리 충돌하며 살아온 그 경험이 바로 나이고, 그들 역시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늘 괴물의 아가리처럼 어둡고 잔인하다. 바라만 보아도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이 사랑하는 여인과의 몇 년 후는 어찌될 것인가? 군대에 가면, 그래서 불합리한 또 하나의 세계로 격리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I.M.F. 시기보다도 더 어렵다는 이 시대에, 과연 내가 이 세상의 틈바구니에 단단하게 발을 붙이고 안락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나는 사랑하는 내 여인에게 따듯한 짚자리를 만들어 주고, 그곳에서 2세를 낳을 수 있도록 다가올 시간이 순순히 허락할 것인가? 세상과 경제라는 알쏭달쏭한 통계자료 앞에서 그들은 또한 무력하다.
이미 몇 번 우주에서 가장 외로운 밤을 지나온 경험이 있는 그들은, 불에 데인 적이 있는 아이들처럼 모든 쓰린 경험에 대하여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퇴촌은 외로운 곳이다. 어쩌면 고독의 세계 표준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미래를 그저 용감하게 살아가는 철이 덜난 중년의 사내가 있는 곳이라서, 그들은 나와 함께 소주잔을 들며 혹시 모를 불행에 대비하는, ‘운명에 의한 지나친 낙루방지’를 위한 일종의 생화학전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너희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난은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날은, 안개가 개면 유달리 맑은 날이지. 참고 견뎌라. 다가오는 모든 찬란한 아침은 너희들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기에 너희들에게 확신을 지니고 말해 줄 수 있다. 잠깐의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거리로 뛰어든 말은 곧 피살된다. 그러나 메커니즘의 내부에서 노력하는 자들은, 언젠가 능동적으로 메커니즘을 움직이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부분들이, 우리가 역동적인 노력으로 해결했던 부분들보다 더 많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진실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희를 괴롭혀 왔던 애끓는 시간들은 어찌 되었느냐? 그저 소주 한잔 분량의 씁쓸한 과거가 되었을 뿐이다. 걸어라. 비가 오건 눈이 오건 걸어라. 두려워 말고 당당히 네가 선택한 길을 가라. 어느 길의 끝에도 나름대로의 약속은 있다. 미래는 결국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 무식한 용감이 지혜로운 망설임보다 백배나 더 나을 때도 있다.”
이윽고 그들의 미소는 여유롭게 흐트러지고, 낡은 L.P.의 음악을 한 움큼씩 가슴 속에 지급받고 잠이 든다. 내말에 위안을 받은 것은 아니다. 소주가 그들의 자아를 편안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때로 한 밤에 젊은 영혼이 오열하는 흐느낌으로 잠이 깬다. 여린 그들의 속은 독한 소주를 받아내기엔 역부족인 것이다. 나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갑자기 막막한 현실에 깨어난 그들의 모든 두려움과 고통이 밤을 뚫고 그대로 내게 전이되어 오는 것이다. 유난한 개구리 소리가 짙은 안개와 두터운 어둠을 뚫고 베갯머리로 다가온다.
새벽녘이 되자 다시 부드러운 비가 대지를 두드린다. 안개는 삼켜 버렸던 산들을 하나씩 다시 토해낸다. 퇴촌은 지금 안개 가득한 아침이다. 그러나 오늘 당장 맑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길고 지루한 장마철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8월이면 쏘는 듯한 매미의 울음소리와 새하얀 햇살이 온 누리에 가득할 것이다. 이윽고 고추잠자리가 날기 시작하면, 우리는 또 한번의 가을을 수확할 것이 아닌가? 어쩌면 가장 사소한 것들 속에, 신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중요한 암시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들녘의 고요한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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