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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과 자장면

최길시 2021. 10. 20. 06:27
글쓴이 김명기 [홈페이지] 2011-04-21 11:03:16, 조회 : 900

 

 

곰탕과 자장면

우리 회사는 작지만 규칙이 엄격하다. 이사회를 하고 간단히 회식을 하기로 했다. 동네에 보아둔 곰탕집. 수육과 곰탕 그리고 소주 몇 잔. 그렇게 우리가 지닌 문제가 작은 회식자리의 웃음 속에 풀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같은 소망을 지니고 이 행성의 길 아닌 길로 가고 있다.

‘수육 먼저 주시고, 소주 한잔 하고 나면 곰탕을 주세요.’

나는 분명히 그렇게 주문했다. 그런데 곰탕이 먼저 나온다.

‘아니 이게 뭡니까?’
‘아 곰탕은 끓는 것을 퍼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먼저 나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안주는 필요 없네. 수육은 취소해 주세요.’
‘아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먼저 나온 곰탕 몇 그릇을 황망하게 걷어간다. 그리고 또 한참. 드디어 수육이 나왔다. 수육에 젓가락을 넣으며 바라보니, 곰탕 그릇들은 이동용 카트에 담겨진 채 기다리고 있다. 어쨌든 모처럼의 회식이니 분위기를 깨기 싫어 수육에 소주 한잔씩을 한다. 한잔 소주가 들어가면 매듭 진 부분이 풀리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 넓을 때는 우주도 담지만, 좁을 때는 바늘하나 꽂을 자리가 없는 것이 사람마음이다. 이런 회식 자리는 삶의 정류장이고 쉼터가 된다.

어느 정도 수육 안주로 소주를 먹어 갈 때, 곰탕을 달라고 했다. 한참 전부터 이동 카트에 담겨 있던 미지근한 곰탕, 식어서 기름이 뭉치기 시작한 곰탕을 그대로 내 놓는다. 이 정도면 포기다. 사람에 대한 배려나 예의가 전혀 없는 모르쇠 식당에 무슨 충고가 먹히겠는가? 나오면서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해 준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이 식당에서 회식하는 일은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블랙데이래요. 모처럼 자장면 먹어 볼까요? 우리는 애인이 없는 부부잖아요.’
‘호호호. 그래요.’

집 앞에 작은 중국집 주로 얼큰한 짬뽕을 먹지만 오늘은 자장면이다.

‘칭따오 맥주와 탕수육 작은 것 하나. 그리고 자장면을 주세요.’

잠시 후 맥주와 자장면이 나온다.

‘아니 이게 무슨... 자장면 안주로 맥주를 마시고, 탕수육을 식사로 하라는 건가요? 탕수육 안주에 맥주 한잔하고 식사로 자장면을 먹는 게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아닌가요? 무슨 배달을 시킨 것도 아니고...’
‘아, 네 자장면은 물이 끓고 있기 때문에 면만 넣으면 되고요. 탕수육은 튀기려면 오래 걸리기 때문에요.’

나는 마침내 이 대목에서 폭발한다.

‘아 이 사람이? 물이 끓건 말건 그건 댁에 사정이고, 나는 탕수육 안주로 맥주 한잔하고 자장면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제 자장면 안주로 맥주를 먹게 생겼지 않아요? 어째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듣나요? 지금 맥주와 자장면 먹고, 나중에 배부른데 아무 것도 없이 탕수육만 집어 먹으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갈비 집에서 소주와 냉면이 먼저 나오면, 나중에 갈비만 먹어도 되는 건가요? 그래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이러다 보니 자장면으로 맥주를 먹기도 그렇고, 맥주 김빠지도록 자장면이 불어 터지도록 기다리기도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다. 아내는 불편한 표정이다. 단무지 안주로 맥주 한잔 하다 보니 탕수육이 나온다. 자장면은 이미 퉁퉁 불어 젓가락이 안 들어간다. 나는 아내에게 사과한다.

‘여보, 미안해요. 내가 많이 불편하지?’
‘아뇨... 별로...’
‘나는 예전부터 울 아버지가 이럴 때 무척 싫었는데, 이젠 내가 완전히 아버지네. 허허허....’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중국집에서, 곰탕집에서 시끄럽게 규칙을 따지는 중늙은이다. 젊었을 때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 노인네들이 무척 싫었다. 이제는 그들이 왜 시끄럽게 뭔가를 외쳤는지 대략 짐작할 나이다. 나는 이제 막 50에 들어서고 있다. 나는 문득 메아쿨파를 깨닫는다. 모든 것이 내 탓이다. 내 큰 탓이다.

이런 것은 매일 겪는 일이다. 매번 탓하는 것은 소용없다. 앞으로 나는 먼저 수육과 소주만을, 맥주와 탕수육만을 주문할 것이다. 한참이 지나고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곰탕과 자장면을 주문할 것이다. 순서에 대하여, 배려에 대하여 내 기준을 적용하기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시끄럽다. 이런 순서와 규칙을 아는 사람들의 식당은 대박이 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대박 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지근하게 식은 곰탕과 불어터진 자장면을 먹지 않으려면 약간의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 또 하나를 배운다.


www.allbaro.com

즈문마을에서...

PS : 식당 자리와 밥, 그리고 지나는 사람이 많으면 장사가 된다? 천만에 말씀이다. 식당하나에도 밥 한 그릇 내 오는데도 엄격한 규칙이 있다. 그 순서가 무너지면 진수성찬, 산해진미도 다 별 무소용이 된다.

곰탕은 푸기만 하면 되니 먼저 먹어라. 물이 끓었으니 자장면 먼저 먹어라. 무슨 짓인가? 고객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것은 망하려고 하는 사업이다. 세심한 배려와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기. 무릇 장사하는 사람은, 대박 기다리지 말고 우선 사람의 마음을 잡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