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지우고 버리고 잊고
노을도 빛을 잃어
어둑해진 기억의 메모장이
바람도 없이 펄럭인다
색 바래고 귀퉁이 닳은 장면마다
올망졸망 새겨진 그림자들
주저주저
검지 끝에 침 발라
문질러 보지만
그림자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눈 내리면 묻혀 없어질 걸
내 손으로 차마 어찌
하다가도
먼 길 떠날 때
훨훨
한 줄기 바람 되려면
눈 꾹 감고
마음자락 한 끝을 놓아라
기쁨은 잠시 살갗을 스치는 봄바람
슬픔은 가슴께를 넘어
목 밑까지 차오르는 밀물이었지
이제
기슭에 나앉아 물수제비 뜨며
흐르는 강물에
어지러운 손 주름을 씻자
모두 다
지우고 버려
백골만 앙상히 남더라도
남아있을 미련 씻어
무지의 생에 바칠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은 남겨두자
☆. 돌아보면 먼 길 달려온 발자국도 안 보이는 데 뭘 지우나? 그러나 내 가슴속을 헤집어보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구구한 사연들이 빼곡이 머리들을 내밀고 있다.
살아오면서 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버리며 잊으며 왔는데 이제 새삼스럽게 버릴 건 뭐 있겠나? 하면서도, 태어나면서 핏줄에 얽힌 것이나, 소매스쳐 맺은 인연들이 자의로 타의로 정리되지 못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어차피 어느 한 순간 모두 날아가버릴 것인데 그냥 내버려두자 하다가도, 살아있는 하루라도 가볍고 홀가분하도록 무심이 되게 바람에 낙엽 실어보내듯 깨끗이 날려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빈손으로 태어나 넉넉지 않은 일생을 살아왔으면서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이고 쌓이고 맺어진 것들이 뭐가 이렇게 많은가. 떠날 때 미련없이 행운유수(行雲流水)되어 홀가분히 날아갈 수 있도록 지우고 버리자.
모든 것은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가고 있다. 잊고 버리는 일이란 내 스스로 행하면 되는 것인데 마음에서 잊고 버리려고 마음먹었으면 그것으로 홀가분해져 편하고 가벼운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게 어디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인가!
늘, 황혼이 노을빛 아래로 고요히 침잠하기를 바라는데, 호수같은 마음은 잔잔히 머물지 못하고 일렁거리다가 출렁거리다가 파도치다가……. 아마도 마지막 순간이 되어 물이 말라버리고 나서야…….
'최길시 시집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52. 그 리 움 (0) | 2025.07.22 |
---|---|
50. 걸으며 걸으며 (0) | 2025.06.29 |
49. 종(種)의 자유 (0) | 2025.06.11 |
48. 아침까치 (0) | 2025.06.01 |
47. 생명의 본연(本然) (0) | 2025.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