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시집/시(詩)

51. 지우고 버리고 잊고

최길시 2025. 7. 19. 14:56

51. 지우고 버리고 잊고

 

노을도 빛을 잃어
어둑해진 기억의 메모장이

바람도 없이 펄럭인다
색 바래고 귀퉁이 닳은 장면마다
올망졸망 새겨진 그림자들

주저주저

검지 끝에 침 발라
문질러 보지만

그림자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눈 내리면 묻혀 없어질 걸

내 손으로 차마 어찌
하다가도

먼 길 떠날 때
훨훨

한 줄기 바람 되려면
눈 꾹 감고
마음자락 한 끝을 놓아라

 

기쁨은 잠시 살갗을 스치는 봄바람
슬픔은 가슴께를 넘어

목 밑까지 차오르는 밀물이었지
이제

기슭에 나앉아 물수제비 뜨며
흐르는 강물에

어지러운 손 주름을 씻자

 

모두 다

지우고 버려

백골만 앙상히 남더라도

남아있을 미련 씻어
무지의 생에 바칠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은 남겨두자

 

 

 

. 돌아보면 먼 길 달려온 발자국도 안 보이는 데 뭘 지우나? 그러나 내 가슴속을 헤집어보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구구한 사연들이 빼곡이 머리들을 내밀고 있다.

살아오면서 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버리며 잊으며 왔는데 이제 새삼스럽게 버릴 건 뭐 있겠나? 하면서도, 태어나면서 핏줄에 얽힌 것이나, 소매스쳐 맺은 인연들이 자의로 타의로 정리되지 못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어차피 어느 한 순간 모두 날아가버릴 것인데 그냥 내버려두자 하다가도, 살아있는 하루라도 가볍고 홀가분하도록 무심이 되게 바람에 낙엽 실어보내듯 깨끗이 날려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빈손으로 태어나 넉넉지 않은 일생을 살아왔으면서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이고 쌓이고 맺어진 것들이 뭐가 이렇게 많은가. 떠날 때 미련없이 행운유수(行雲流水)되어 홀가분히 날아갈 수 있도록 지우고 버리자.

모든 것은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가고 있다. 잊고 버리는 일이란 내 스스로 행하면 되는 것인데 마음에서 잊고 버리려고 마음먹었으면 그것으로 홀가분해져 편하고 가벼운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게 어디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인가!

, 황혼이 노을빛 아래로 고요히 침잠하기를 바라는데, 호수같은 마음은 잔잔히 머물지 못하고 일렁거리다가 출렁거리다가 파도치다가……. 아마도 마지막 순간이 되어 물이 말라버리고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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