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集을 내며 -
因, 그리고 70년 緣의 결실 –나의 詩 행력-
국민학교 6학년(1953).
6.25로 학교집이 불타버려, 작은 칠판을 들고 산으로 냇가로 사랑방으로 돌아다니다가, 학부모들의 울력으로 흙벽 초가의 가교사를 지어줘 비록 바닥은 흙이었지만 호사스럽게 판자(대패질도 안 된 거친 판자) 책걸상에서 공부하게 되어 황송했는데, 며칠 되지 않아 선생님께서 뜬금없는 숙제를 내셨다.
‘시 한 편씩 써 오너라’
‘시? ’
난감하였다. ‘접한 기회도 별로 없었고 배운 기억도 없는 생소한 시를 써 오라고?’ 태어나 처음으로 ‘詩’ 라는 걸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 어떻게 써야 하는 건가? 안 해 가면 호랑이 선생님 벌이 무서울 텐데…….’ 고민하며 여기저기 뒤적거리다가, 형 책상의 중학교 校誌 속에서 학생들이 쓴 시 여러 편을 발견하고 ‘옳다구나’ 쾌재를 불렀다. 그 중에 ‘시계’ 라는 시가 알기 쉽고 마음에 들었다. 어려운 낱말 몇 갠가를 내맘대로 고쳤는데, ‘추’를 ‘부랄’로 고친 기억만은 지금도 또렷하다. 우리집에도 전쟁을 치러 그런가 가다 서다 하는 벽시계가 하나 있었는데 ‘추’란 말은 들어본 적 없고 언제나 ‘시계 부랄’이라고 했으니까.
선생님은 우리들이 낸 숙제를 돌려주시면서, 나의 그 ‘시계’와 함께 나를 엄청나게 칭찬해 주셨다. 학교에 다닌 이래 선생님께 그렇게 칭찬들은 일은 처음이었는데, 기쁨의 들뜸보다도 도둑질한 게 들통날 것 같아 마음이 졸여, 앞으로는 절대로 남의 시를 베껴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이 돌려주신‘시계’에는 매우 잘 썼다는 평과 함께 ‘부랄’이 ‘진자’로 고쳐져 있었다.
중학교 2학년(1955).
어느날 종례시간에 선생님께서, ‘특활을 편성하니 내일까지 어느 부서에 들어갈지 써내라’면서, 칠판에 특활 부서명을 쭉~ 써주셨다. ‘특활?(특별활동의 준말이란 걸 썩 후에야 알았다. 교육과정에 특별활동이란 것이 이때 처음 생겼던 것이 아닐까).‘ 특활이란 게 뭐하는 거야? 돈 내라는 건 아닌가?’ 누군가에게 물으니 잘하거나 좋아하는 부서를 써내면 된단다. 아무리 훑어보아도 내가 잘하거나 좋아하는 부서가 없었다. 체구도 작고 운동신경도 날래지 못한 내가 운동부서에 갈 수도 없고, 특별한 재주라곤 없어 즐겨한 놀이라곤 종곱질과 전쟁놀이밖에 없는데……. 문득 국민학교 때 선생님께 시 칭찬들은 생각이 떠 올라 ‘문예반’을 적어냈다. 중학교 특활반에서 무얼 배웠거나 활동했던 기억은 남아있는 게 없다.
사범학교에 입학하자 또 특활반 편성이 있었다. 밴드반에 들어가 생전 처음 보는 신비한 악기를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행사 때마다 악기 들고 행진을 해야 하는데 키가 작으니 남의 웃음거리나 될 것 같고……. 어쩔 수 없이 또 문예반을 적어냈고 시를 배우겠다고 했다. 잘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짧게 몇 줄만 쓰면 되니까 쉬울 것 같아서였다. 문예반 담당 윤명선생님은 지도에 열정이 대단하셨다. 매일 방과후에, 그리고 방학 때에도 불러내 지도해, 여러 사람이 전국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에 재주가 있거나 의욕이나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 읽을 기회도 공부할 욕구도 변변히 없었고, 방과후 활동도 툭하면 통학버스 놓친다는 핑계를 대고 땡땡이친 나였으니……. 선생님은 수시로 시 내라고 면독했지만 나는 몇 번이나 냈던가? 3학년 때 비로소 내 일생일대 최초의 시가 학교 문예지 『보리밭』에 실렸다.
‘바람 속에서’
그 『보리밭』은 나의 불민함으로 챙겨두지도 못했고, 혹시나 하여 폐쇄된 모교의 자료가 남아있을지도 모를 강릉대학 도서관에 문의해도 그런 자료는 찾을 수가 없단다. 봄날이 되면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하던 들판과 구릉의 그 흔하던‘보리밭’조차 이제는 만날 수 없어 못내 아쉬운데, 띄엄띄엄 기억나는 몇 구절을 떠올려보면 제법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었을 듯…….
3년간 명패만 달고 있던 문예반의 명분으로 교직에 나가서도 주로 문예반을 담당하게 되는 바람에 ‘글짓기 지도’책을 읽었고, 미술 선생님의 시화전에 시 한두 작품 출품한 적이 있었고, 당시 유행하던 친구·동료들 결혼식 축시를 몇 편인가 썼던 외에, 의지를 가지고 시 공부를 한다든가 시인이 되겠다든가 하는 생각은 내 마음 한쪽 구석에도 자리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무슨 緣에서인지 가끔 신문에 게재되는 시는 이해하고 느껴 보려고 한참씩 들여다보았고, 좋은 시집들은 바람에 펄렁이듯 뒤적였다.
일본에 있을 때는 하이쿠(俳句)의 리듬과 촌철살인의 묘에 끌려 잠시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시간이 허락했더라면 하이쿠 공부는 한번 해 보고싶었었다.
젊을 때는 25시간을 만들어 다시 쪼개 쓰고 싶을 정도로 시간이 각박했는데, 요즘은 TV 켜놓고 꾸벅대기도 하고, 밤중에 수시로 잠이 깨도 하릴없이 뒤척이며 또 잠을 청할 정도로 헐렁하다. 따져보면 내 인생에 주어진 모든 시간이 한결같이 밀알 같고 소중한데, 불을 켜고 애쓰는 사랑스러운 사람에게조차 양도할 수도 없는 시간을 이렇게 안타깝게…….
년 전에 제자인 소설가 이순원이 ‘선생님, 시집 내시죠’ 했을 때도, ‘씰데없이……’. 내가 시 공부한 것도 아니고,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더구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끼적거린 걸 세상에 내놓다니…….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내게서 나올 것이 무엇이 있으랴 싶어 열심히 가꾸어오던 텃밭도 덮어버리고 서녘마루에 돌아앉았는데…….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이것이 이승에서의 ‘詩’와 나의 인연이 아닐까 싶어, 그동안 마음구석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모으고 먼지를 털어 ‘시’를 엮고 다듬어 보려고 한다. 60여년 전 철없는 소년이 실없이 던진 돌멩이 하나가 運命처럼 일생의 화두가 되어 어찌어찌 여기까지 구르며 이어왔기에, 이제 마뜩잖은 숙제를 제출하듯 묻혀있던 것들을 부스럭거리며 주섬주섬 꺼내 하나씩 내어놓으려고 한다.
2021년 마른 잎에 서리내린 날에
二儀洞에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