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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업』초록(抄錄)(6)

최길시 2021. 10. 11. 10:11
글쓴이 kilshi 2008-09-10 13:44:07, 조회 : 1,021

 

6. 가슴 뛰는 삶은 위하여

 

   당신은 삶을 위하여 얼마나 시간을 할애하는가? 당신이 그 모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삶은 언제까지나 저쪽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의 인생 시계는 몇 시인가?

 

삶은 시간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살고, 또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시간 속에서 생을 마칩니다. 웹스터 사전은 시간을 ‘연속선상의 두 지점 사이의 간격’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흔히 탄생을 삶의 시작으로, 죽음을 삶의 끝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탄생과 죽음은 연속선상의 두 지점일 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관찰자에 좌우되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것들이 변합니다. 안도 변하고 바깥도 변하고, 우리의 외모도 내면의 자아도 변합니다. 삶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대개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변화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상황에 작별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변화는 대개 지금까지의 문이 닫히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 문들의 이름은 끝, 완성, 이별, 죽음 등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불안정한 시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시기는 닫혀진 문을 보고 슬퍼하면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가 가장 힘이 드는 때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바로 그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변화와 맞서 싸우지 말고, 변화를 껴안는 방법, 받아들이는 방법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현대인들은 늙어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름살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예방하고, 감추고, 제거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젊음의 에너지와 패기를 그리워하면서도 모두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 시절의 방황과 혼돈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삶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더 이상 무의미한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며,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가도 압니다. 일단 이 배움을 얻고 나면, 누구도 그것을 젊음과 맞바꾸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과연 얼마나 오래 살고 싶어 할까요? 만일 200년, 아니 영원히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회를 받아들일까요? 사실 우리는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삶의 기간을 훨씬 연장해서 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이해 수준을 벗어날 정도로 변하고,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된 후에도 계속 살아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공허할까요?

한 남자가 92세가 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휴가 때 어머니를 당신의 고향인 댈러스로 모시고 갔어요. 우린 최신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비행기의 최신식 화장실 문을 여느라고 애를 먹으셨어요.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화재 경보가 울렸어요. 깜짝 놀라 어머니 방으로 뛰어가 보니 어머니는 잠옷 차림으로 문 밖에 나와 계셨어요. 나올 때 자석 카드 열쇠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잊으셨는데, 그만 방문이 잠겨버린 거였어요.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어머니는 방에 다시 들어갈 수나 있을지 걱정하셨어요. 여행이 끝날 때쯤,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얘야, 난 더 이상 이 세상에 맞지 않는 것 같구나. 전자레인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겠고, 리모컨으로 TV채널을 돌리는 것도 낯설기만 하다. 열쇠 대신 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모르겠고, 내 친구들도 이제 모두 떠났다. 세상은 계속 변하는데 난 너무 뒤쳐져 있어.’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그 여행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복잡한 심경이었을지 알게 되었지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그에게 우편물이 도착하는 시간은 불행한 시간입니다. 우편물 속에는 자신의 부모를 괴롭히는 빚쟁이들의 독촉장이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편함에서 자주 아버지의 보너스 수표나 친구의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발견하곤 한 또 다른 소년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첫번째 소년은 우편물이 도착하면 저도 모르게 신경질 적으로 반응하기 쉽지만, 두번째 소년은 행복한 마음으로 우편물을 기다립니다. 그들의 감정은 현재 그들에게 도착하는 우편물의 내용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우편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과거나 미래의 모습을 봅니다.

 

어제의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크나큰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샤워를 하며 어제의 때를 씻어 내지만, 어제의 느낀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며, 행복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문을 닫지 말고 가끔씩 그 문을 들여다보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잭은 악성 림프 종양에 걸렸는데 병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그는 이 순간을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는 그의 삶의 방식은 병이 깊어지면서 더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한 순간도, 그 어떤 것도 놓치려 하지 않습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느 샌가 미래에 의존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미래만 바라보며 살고, 도 어떤 이는 미래를 꿈꾸며, 또 다른 이는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이 모든 접근은 현재를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확신할 수 없으며, 두 말할 필요 없이 미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대개 과거란 현재 이전의 시간이며, 미래는 앞에 놓인 시간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시간이 일직선으로 된 연속선상에 놓여 있음을 전제로 한 가정입니다. 과학자들은 시간이 일직선이 아니며,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라는 단단한 형태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면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만일 시간이 직선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프랭크와 마거릿은 50년 동안 멋진 결혼 생활을 해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두 사람은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려 죽게 되자 마거릿은 말했습니다.

‘난 이 병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죽으리라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더 이상 프랭크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병이 깊어지면서 더욱 고통스러웠지만, 죽기 몇 시간 전, 그녀는 말했습니다.

‘난 곧 떠날 거예요. 하지만 이젠 괜찮아졌어요.’ 프랭크가 물었습니다. ‘괜찮아졌다니 무슨 뜻이오?’ ‘방금 누군가, 내가 가게 될 곳에 당신이 이미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그곳에 가면 당신이 있을 거예요.’

과연 병실에 앉아 있는 프랭크가 사랑하는 아내를 천국에서 동시에 기다릴 수도 있을까요?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쯤 시간의 개념에 대한 의문들이 당신의 머릿속을 맴돌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 속에서 살고 숨쉬고 있는 프랭크로서는 마거릿을 다시 보려면 5년, 10년, 아니 20년이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가 가게 될 곳에 시간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녀가 도착한 1초 후에 그가 도착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시간은 죽은 자보다 살아있는 자에게 더 긴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들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종종 그들이 너무 일찍 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이 미완성이라고 생각하지만, 100세 가까이 살면서 멋진 삶을 살아야 그것이 완성된 삶입니까? 베토벤은 겨우 57세를, 잔 다르크는 20세도 안 되어, 존 F. 주니어는 38세에 죽었지만, 이런 삶을 과연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이 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도전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지금 이 순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것, 미래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때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이 신성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초원의 집>에서 아버지역을 맡은 배우 마이클 랜던이 1991년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 크리스토퍼 랜던은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과 두려움을 주었는지 말했습니다.

‘아버진 현명하고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분이셨어요. 아버지의 죽음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그것은 나를 한 인간으로 변화시켰어요. 어릴 때 난 늘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고 불안정했어요.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에 거려져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그늘이 사라진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으로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어요. 나는 죽음 곁에 있었고, 그것을 생생하게 만질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두려워하던 것들도 이젠 두렵지 않게 되었어요. 더 이상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 내가 누구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없이 내게 다가오는 기회들을 붙잡았어요. 두렵던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 않고 영국의 학교에 진학했어요. 편안한 집과 안정된 생활을 떠나는 것이 내게는 큰 모험이었지만, 세상 속에 뛰어들어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보는 법을 배웠어요. 나로서는 정말 큰 변화였어요. 인간은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는 사실을 난 굳게 믿어요.’

 

만일 우리가 기회를 잡고 두려움 속으로 뛰어든다면, 그 속은 아마 두려움 없는 세상일 것입니다. 삶에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가로막지 않을 때 더 많은 일들이 가능합니다.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인 단계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경고 체계 역할을 합니다. 밤늦게 시내의 위험 지역을 걸을 때 두려움은 위험 가능성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라고 우리에게 경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 위험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움을 갖기 쉽습니다. 그런 두려움은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두려움을 이겨 낼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면, 만일 그 많은 기회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꿈꾸기만 해온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편견에서 자유로워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부모에게 입양되어 자라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는 폭력적인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사랑해 줄 부모가 있는 훌륭한 새 가정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혼자 쓸 수 있는 방과, 혼자만의 TV까지 갖춘 좋은 집에서 살게 될 텐데도 아이는 새 부모에게로 간다는 말을 듣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나쁜 상황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새로운 집은 위험으로 가득하게 느꼈습니다. 항상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는 미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아이와 같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자란 우리는 미래에도 두려움만 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들이 실제로 얼마나 일어날까요? 도전적인 스포츠에 참여할 때 즐거울 확률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남을 확률이 높으며, 또한 가끔씩 위기를 겪고 힘든 일을 당하더라도 사업에서 성공할 확률도 높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확률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나쁜 일을 더 많이 예상합니다. 가장 큰 도전은 이 두려움을 이겨 내는 일입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으로 투병해온 트로이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병에 걸렸는데도 아무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트로이는 육체적으로는 잘 견디고 있었지만, 정신은 두려움 때문에 마비가 될 정도였습니다. 친구 빈센트는 그런 나에게 언제나 힘이 되어 줍니다. 그는 언제나 내가 두려움보다 강하다고 말해 줘요. 두려움에 물러서지 말고 그것들과 당당히 맞서라고 합니다.

빈센트의 동료 한 명이 내게 연락했을 때 나는 직장을 쉬고 있는 상태였어요. 그 동료는 자기 동생도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앓고 있고, 병원에서 이제 막 퇴원을 했다고 하더군요. 지금 그녀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는데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묻더군요. 난 생각해 보고 나중에 전화해 주겠다고 하고, 빈센트에게 의견을 물으러 갔어요. 빈센트는 ‘그녀는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하고, 넌 돈이 필요하잖아’ 하면서, 그녀가 곧 죽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모든 두려움이 떠올랐어요. 난 그 일을 할 수 없었어요. 너무 두려웠거든요. 빈센트는 그녀를 한 번 만나 보기라도 해야 할 거라고 했어요. 빈센트와 그 집 현관까지 갔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돌아서려다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기로 결심하고 문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몸무게가 40킬로도 안 돼 보였어요. 벌써 두 차례나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녀의 큰 갈색 눈을 바라보면서 견딜 수 없이 슬퍼졌어요. 결국 이 낯선 여인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야 그녀의 부모님조차 그녀를 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가끔 친구 한두 명이 문병을 왔을 뿐이었어요. 처음엔 파트타임으로 가다가, 시간을 더 많이 늘렸고, 결국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어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죽음이 가까워오자 그녀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그녀는 내가 함께 있어주기를 원했어요. 그녀가 죽던 날, 그녀의 부모를 불렀지만 그들은 대기실에 머문 채 병실에는 들어오지 않았어요.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내가 함께 있다고 말해 주었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두려워하지 마. 두려워할 필요 없어.’하고 말해 주었어요. 그녀가 죽자, 영안실 사람들도 그녀를 만지는 것조차 두려워했어요. 나와 간호사가 그녀를 시신 주머니에 넣었어요.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어요.

트로이는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친절은 언제나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물리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 데이트 신청, 자신의 외로움, 직장에서의 일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두려움은 여러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한 겹씩 벗겨내면, 맨 아래에 자리잡은 것은 대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당신이 누구에겐가 데이트 신청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두려움 밑에는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또 그 밑에는 당신에게 맞는 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또 그 밑에는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두려움은 전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흘러가며, 결국은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은 바로 그 궁극적인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과 마주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두려움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우리에게 두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당신의 삶은 틀림없이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앞 둔 사람에게서 배우는 배움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두려움이 사라질 무렵이면, 우리는 우리가 꿈꾸어온 것들을 실천하기엔 너무 늙었거나 병에 걸려 있을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들을 했다면 어느 날 병에 걸리고 나이가 든다 하더라도 후회로 가득차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한 가지 배움이 분명해집니다. 꿈꾸는 일들이 아직 행동에 옮길 수 있을 때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들에는 ‘행복, 불안, 기쁨, 분노, 등 다양한 이름들이 있지만,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은 오직 두 가지 뿐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입니다. 모든 긍정적인 감정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그 두 가지 감정은 동시에 느낄 수 없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둘 중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곳에 중립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힘든 상황에서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을 한 번 선택했다고 해서 다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는 건 아닙니다. 사랑을 선택하고 나면 많은 두려움이 수면으로 또 떠오릅니다. 이것은 늘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두려움들은 과거나 미래 중 어느 하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만이 현재의 감정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과거에 일어난 어떤 경험이나 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여겨지는 어떤 일들을 걱정하게 만듭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35세의 그래픽디자이너 조슈아는 미술을 전공했고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지금은 명함을 디자인하면서 보냅니다. 그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큰 실패나 패배감을 맛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럴 기회도 없었습니다.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조슈아와 그 문제를 얘기하다 그의 아버지 죽음까지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하셨지만 끝내 못하셨어요.’

‘아버지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죠?’ 조슈아는 한참 후에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는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다만 절대 시도하지 않으셨죠. 돌아가시기 전에 20년 동안 연락이 끊긴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무척 만나고 싶어 하셨지만, 먼저 연락을 하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이제 아버지가 무엇이 문제였었는지 알겠어요. 난 내가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긴 나머지 최소한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어요.’

지금 당장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내가 묻자, ‘그림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돌아가는 순간까지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지만 난 다를 거예요’ 이제 조슈아는 다른 삶을 살 기회, 두려움 없는 삶을 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확실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대담해집니다. 삶의 종착점에 있는 환자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뒤 무한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작은 것부터 하나씩 도전해 가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과 친절의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가장 두려운 일들을 대담하게 행할 때 성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걷어 버리거나 이겨 내야 역설적이게도 삶의 가장 안전한 장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일단 두려움을 뛰어 넘으면 새로운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말했습니다.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두려움이 주는 이런 배움들은 자신의 것으로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경이롭고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려움 없는, 우리가 꿈꾸던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