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2021. 10. 8. 12:16
글쓴이 kilshi 2008-01-16 18:15:24, 조회 : 910

 

 

밖은 영하의 추운 날씨라는데, 유리창 안은 봄 날씨처럼 따뜻한 한적한 오후! 휴대전화가 일상화되고부터는 좀처럼 울릴 리 없는 집전화가 울린다. 수화기를 드니, 어느 중고등학교 문제집 출판사란다. 중학교 3-1 국어교과서에 실린 내 글을 지문으로 쓰려고 하는데 저작권 허락을 받으려고 한단다. 전화를 끊고, 그 글을 찾아 읽어보았다. 아득히 흘러간 일들이었지만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그 때, 남미 3국(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의 한글학교 협회에서 ‘한국어 지도’ 교사 연수를 하는데, 우리 원에 ‘한국어 교수법’ 강사 요청을 해 왔다. 남미는 좀처럼 가기 힘든 곳이라, 모두들 은근히 자기가 가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나서서 로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두 해 전인가 그곳에 출장을 가 본 적이 있기도 했지만, 그 때 나는 ‘한국어과’를 신설하는 일본의 모 대학 교수 모집에 서류를 제출해 놓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교수 모집에 응모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번만은 상당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류 심사 결과가 출장 중에 발표 나도록 되어 있었고, 만약 1차에 선정이 되면 그 다음 지시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사정상 가지 못한다는 의사를 표명해 놓은 터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 하나와 출장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LA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 브라질의 상파울로까지는 참으로 멀었다. 출장은 최대 보름을 넘길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도착하는 다음 날부터 강의를 해야만 했는데, 여독에 일교차가 심한 대륙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날부터 몸살 감기에 걸려 아르헨티나에서의 강의를 끝마칠 때까지 고통과 무아(無我)의 연속이었다. 제일 걱정은 쓰러질까봐 조마조마했었다. 다행스럽게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에서는 한국인 의사가 있어 약을 받고 주사도 맞았고, 한의사로부터 수지침과 지압을 받으며 10여일의 연수를 도중하차 하지 않고 강의를 소화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호텔 방에서 앓느라고 자유 토론 시간과 종강 파티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여 서운했지만…….

 

돌아와 보니, 일본에서 온 정중한 낙방 통지서가 책상 위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글을 읽으니 그 때의 감회가 새롭다.

 

 

2000년대에는 한국어를 세계어로

-남미 한국․한글학교 교사 한국어 연수에 다녀와서-

 

2000년 시대가 시작되었다. 앞으로 세계는 더욱 가까워지고 원활한 정보 교환과 빈번한 교류로 다중문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생각한다. 19세기에 영미문화의 급속한 전파로 영어가 널리 퍼지면서 비영미문화권간의 교류도 영어를 매개로 하는 간접교류가 많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직접적인 교류가 서로에게 더 편리하고 실질적임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세계의 다양한 언어가 각기 자기 문화를 드러내기에 앞을 다툴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한국어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언어가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는 지난 해 11월 남미 3개국(브라질,파라과이,아르헨티나)의 한국․한글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지도법 연수를 하고 돌아왔다. 이 3국에는 한국학교 3개교와 한글학교 51개교에 선생님이 약 370명이나 된다. 특히 한글학교 선생님들은 교사 자격을 가진 분이 많지 않고, 한국어를 전공한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모두 생업에 여념이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현지화하는 자녀들을 보면서, 한국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장래를 걱정하여, 보수(報酬)보다는 후세 교육에 대한 열정 하나로 주로 토요일에 한국말과 한국의 전통문화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고민은, 쉬울 것 같은 한국말 가르치기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효과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제교육진흥원에 매년 이들 재외 한국․한글학교 교원들을 초청하여 연수를 시키는 프로그램이 있기는 하지만 예산 관계로 초청 인원이 극히 한정되어 있어, 남미 지역에서는 몇 해 전부터 바르고 효율적인 한국어교육을 위하여 자체 연수를 실시하기도 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본국에서 강사가 가서 현지 연수를 하게 된 것이다.

비행기 속에서만 꼬박 30여시간을 지내야 하는 장거리 여정, 예상하지 못한 현지의 이상기후에 대한 대비 소홀, 계절이 바뀌고 밤과 낮이 바뀌는 시간차의 부적응, 등으로 힘든 상태였지만, 일정이 한정되어 있고, 한 나라에서 3-4일 동안에 30여 시간의 강의 내용을 소화해야 했으므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의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수강 인원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고, 한결같이 진지한 수강 자세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의 강의도 열기에 넘쳤다.

브라질에서는 교외의 호텔을 빌려 합숙 연수를 하였다. 연수 참가 인원이 80여명이었는데, 젖먹이를 데려오면서 강의 시간에 아기를 돌볼 큰딸까지 데려온 사람, 어린 아이 둘을 떼어놓을 수 없어 아예 남편까지 전 가족이 온 사람도 있고, 환갑이 넘은 분도 있어 우리 강사 두 사람은 나태할 수가 없었다. 무리한 강의 진행이었는데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한밤중의 워크숍 시간에도 얼마나 진지한지, 피곤에 감기가 겹쳐 좀 쉬고 싶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이곳 수강자 중에는 우리말이 서툰 이민 2세 선생님이 두 분 있었는데, 한 분이 강의 내용을 따라갈 수 없어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이민의 역사가 점점 길어지는 이곳 한국 교민에 대한 한국어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파라과이에도 수강 등록자가 40여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는, 600여㎞나 떨어진 한 한글학교에 선생님이 여섯 분인데, 모두 함께 올 수 없어 세 분이 먼저 와서 이틀을 받고 밤차로 내려가면 나머지 세 분이 같은 날 밤차로 밤새도록 올라와 나머지 이틀 강의를 받는다는 분들도 있었다. 브라질에서 가벼운 기침으로 시작된 감기가 목이 부어오르고 기침이 심해졌는데도 차마 시간을 단축하자거나 쉬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감기약을 계속 먹는데도 차도가 없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기도 하였으나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강의 마지막 날, 운동장에서는 아침부터 현지인 두 명이 아주 널따랗게 통나무 숯불을 준비하고 종일토록 구워낸 ‘아사도(남미식 불고기)’ 요리는 독특한 맛도 맛이려니와 만드는 정성이 가슴 뭉클하게 고마웠다.

아르헨티나의 50여명 수강자 중에는, 1,600㎞ 밖에서 이 강의를 듣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와 호텔에서 묵으며 수강을 하고 있었는데, 일정 중에 발목을 삐어 절룩거리면서도 끝까지 수강을 한 분도 있었으며, 본업이 한의사라는 연세가 지긋한 한 분은, 나의 감기가 피로가 쌓여 낫지 않는다며 쉬는 시간마다 피로를 푸는 침을 놓아 주기도 하고, 지압을 해 주기도 하고 작은 자석을 손가락에 붙여 주기도 하였다. 여기서도 학교 재단 이사장님의 도움으로 현지 병원에 다녀왔지만, 나아야겠다는 생각보다 강의 도중에 제발 기침이 나지 말고 수료식 때까지만이라도 버텨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현지 선생님들은 우리 교민 자녀들만이 아니라 현지 주민이나 학생들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데, 이번 한국어 연수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선생님들의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가르침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 현지 민족교육 재단 이사회의 적극적인 후원, 그리고 이 사업을 주관했던 한국교육원의 노고 덕분이었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치욕적이고 정말 힘들었던 1900년대가 막을 내렸고, 2000년대가 새 아침의 문을 열었다. 다가올 다중문화시대에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 문화를 세계에 펼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한국어를 세계화하여야 한다. 언어의 세계화는 먼저 그 나라의 국력과 직결된다. 다음으로는 다른 언어권 사람들이 쉽고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의 개발이 필요하고, 외국인들에게 접할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한다. 한국어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560여만의 우리 재외동포 사회가 그 전초 기지가 되어야 하며, 11,000명에 이르는 재외 한국․한글학교 선생님들이 훌륭한 첨병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기회였다.

(2000년 3월,‘교육마당 21’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