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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蘭草)' -이병기-

최길시 2021. 10. 8. 12:06
글쓴이 kilshi 2008-01-07 20:30:49, 조회 : 875

 

 

 난이 드디어 부풀었던 가슴을 활짝 열었다. 수줍은 듯한 자태, 스쳐오는 숨막힐 듯한 그 향기……. 고등학교 때 배웠던 이병기의 시조 ‘난초’가 생각났다. 

 

난초(蘭草)

                                                      -이병기

1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르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