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2021. 10. 6. 08:14
글쓴이 權五翼 2007-07-03 20:09:23, 조회 : 1,733

 

 

그날,

누구나 살면서 잊으면 안 되는 특별한 날들이 있습니다.
본인생일, 결혼기념일(저는 뭐 자주 잊어먹지만), 부모님 기일,....등등
저에겐 또 다른 날도 특별합니다.
며칠 전에 지난 6월 28일이죠.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살아갈 입대(入隊)일입니다.

1977년 그해는 무척 더웠죠.
여름 내내 30도를 오가는 폭염이 계속 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묵호는 취약지구 선정으로 대부분의 친구들이 방위로 빠져 현역으로 입대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나 역시 당시는 체중이 간들간들해서(54킬로, 지금은 75킬로, 흑)
혹시 하는 마음에 아 에 속 편하게 해병대로 지원 하려고 친구랑 작전을 짜기도 했죠.
당시 나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군대는 반드시 현역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투철했었고 방위로 빠진다는 건 상상도 안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애국심이 투철하거나 국가관이 확실해서 그런 건 아니죠.
이유는 오직하나, 집에서 멀리 떠나고 싶었던 그런 마음뿐이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 현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아 현역으로 갔다는 표현이 요즘 아이들은 생뚱맞게 들리겠지만
아무튼 당시 저의 기분은 그랬다는 얘깁니다.

입대전날.(6월 27일)

이른 아침,
어깨까지 치렁거리던 긴 머리카락을 이발소에서 바리깡으로 밀어버리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괜히 서글퍼 애써 고개를 돌립니다.

공무원이셨던 선친은 당시 도계에서 근무하실 때라,
나는 며칠 전부터 그곳에 있으면서 입대 준비를 마쳤죠.
이른 점심은 가족모두 역전부근에 있던 뚱보냉면집에서 냉면을 먹습니다.
냉면이라면 죽고 못 사는 나의 식성을 선친도 알고 계셨고
해서 한동안 먹지 못할 걸 예상한 아버지가 점심은 냉면으로 정하신 거죠.

선친께서 굳이 입장권을 끊어 프레트 홈까지 나오십니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평탄하지 못하고 혹독한 사춘기를 보낸 큰 아들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모양입니다.
시험도 떨어지고 학교도 옮겨 다니고..........
그리고 틈틈이 쌈박 질도 하고
나에게는 참으로 질풍노도의 시절이었습니다.
큰 아들 때문에 아버지는 하루라도 맘 편한 날이 없었는데..........

다행히 동생들이 공부를 잘해주어,
동생 두 명은 강고를 나왔는데
한 놈은 영동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강고에서도 전교 1, 2등을 했으니
큰 아들에게서 느꼈던 배신감을 어느 정도 만회는 했습니다.

부산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역으로 들어옵니다.
(논산훈련소가 아니고 안동 36사단 신병교육대로 입영)
묵호에서 출발한 친구들이 나를 발견하곤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듭니다.
같이 입대하는 친구 두 명입니다.
박아무개(지금 정통부 사무관), 배아무개(지금 신한은행 지점장) 두 녀석이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거립니다.

아버지는 뒷짐만 지고 그냥 고개만 끄덕입니다.
무슨 말이 필요했겠습니까?
나 역시 아무 얘기도 안하고 목례 만 드리고 기차에 오릅니다.

기차가 움직이자 아버지는 내 쪽으로 걸어오시면서 무슨 말을 중얼거립니다.
몸조심하라는 얘기 같았습니다.
난 그제 서야 서서히 멀어져가는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버지도 응답의 손을 흔듭니다.
아버지가 울고 있는지 연신 손을 눈으로 가져갑니다.
기차가 당신 시야에서 사라 질 때 까지 아버지는 손을 흔들고 계십니다.

그제 서야 나도 내 두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오래 만에 흘려보는 눈물입니다.
아버지 !!!
30년이 지난 지금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날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내가 아버지 곁을 떠나 처음으로 홀로 서는 바로 그날입니다.
1977년 6월 27일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 기차가 안 보일 때 까지 서 계시던 아버지.
그때 아버지 나이보다 지금 내 나이가 훨씬 더 많지만
그때 아버지만큼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