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2021. 10. 24. 10:00
글쓴이 김명기 [홈페이지] 2012-11-13 22:03:28, 조회 : 1,098

 

 

얼음 뗏목(1)

꿈에서 현실로 간신히 한 발자국을 옮겨놓았을 때, 누군가가 현실의 저편에서 꿈속으로 손을 뻗어 침실 문을 노크했다.

"눈이 와요."
눈을 뜨고 거실로 나가자, 나는 갑자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雪國(설국)에 서 있었다. 눈은 숨이 멎을 만큼 숲을 가득 채우며 내리고 있었고, 나는 단번에 이 세상 따위는 확실히 잊고 말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 때문에, 삶은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가치를 지니는 모양이다. 밤알크기의 눈송이들은 제자리에 멈추어 있고, 나는 천천히 거실바닥이라는 현실에서 떠오르고, 몇 가지 기억들이 커피 잔을 쥔 손에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아마 초등학교 2~3학년 시절의 구석기말처럼 오래된 일이지만, 확실하게 각인된 기억 속에 이런 겨울 날이면 동네 형님들이 온 동네의 고만한 꼬맹이들을 모두 집합 시켰다. 시작하는 감기 열 때문에 어질어질 아침, 뜨거운 아랫목에서 할머님이 묻어 놓으신 침감을 깎아 먹으며 문풍지 사이로 들리는 무시무시한 겨울바람 소리를 들릴 때마다, 이불귀를 단단히 잡아당기곤 했었다. "저리안가?", "오빠만 덮어?" 세 살 터울의 여동생과 이불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모여라아!" 소리가 들리면 갑자기 밥을 먹다말고 귀를 쫑긋거리는 누렁이가 되어 바깥의 동정에 신경을 기울이곤 하였다. "남대 천 가자아..."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들려오는 소리를 향하여 토끼처럼 달려 나가려 했다.

"야아 야, 옷을 제대로 입어야지." 뒤 꼭지를 잡아 다니는 어머님의 만류로 겨우 누비바지와 스웨터를 껴입지만, 마음은 이미 골목길에서 형님들과 함께 뛰고 있었다. "나도 가.", "여자는 안돼." 눈물이 그렁한 여동생을 바로 바라보기가 안타까웠지만,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엄연히, 거친 남자들의 모험 가득한(사실은 꼬맹이 패거리의) 세계였다.

"다 왔냐? 너, 너, 너는 가서 연탄불 가져와, 너는 가서 톱하고, 도끼, 망치, 너는 집에 고구마 있지? 그래 구운 걸로 빨랑 가져와. 너는 장대 가져오고!" 대장 형님은 일제히 줄을 선 동네 꼬맹이들에게 익숙하게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받은 꼬맹이들은 혹시라도 자기를 떼어놓고 갈까봐 발길보다 마음이 급했다. 그렇게 개털 모자를 쓴 무질서 정연한 패거리들이 주욱 늘어서면 그제 서야 대열을 맞추어 남대 천으로 향한다. 물론 요렇게 대오를 맞춘 행렬은 한 오 분쯤 뒤엔 결국 엉망인 꼬맹이 패거리가 되기 마련이다.

눈으로 온통 하얀 세상이 되어 버린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가다보면 뒤 꼭지가 이상하다. "어? 누렁이 너 빨리 집에 안가?" 언제부터인가 누렁이가 쫄랑쫄랑 따라오고 있다. "가! 가란 말이야!" 누렁이는 발길을 멈추고 귀를 조금 내리고 꼬리를 감으며 좌우로 몸을 돌릴 뿐,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눈을 뭉쳐서 냅다 개에게 던진다. "깽!"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누렁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돌아간다. 하얀 눈밭에 꼬맹이들의 발자국과 개가 이리저리 뛰며 달아난 까만 발자국이 남는다.

도립병원 곁에서 큰길을 건너, 커다란 눈 모자를 눌러쓴 덩치 큰 頌德碑(송덕비)들이 주욱 늘어서 있던 남대 천 제방에 오르면, 갑자기 세상은 시야가 닿는 끝까지 시원하게 트인다. 강에는 두터운 얼음이 눈을 덮고 있고, 한 쪽 귀퉁이로만 새파란 강물이 보인다. 봄이면 겨우 내 묵은 이불빨래를 반 자른 양잿물 드럼통에 모닥불을 피워 삶는 어머님의 곁에서,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개구리를 잡으며 한 나절을 놀았고, 여름이면 미역 감는 물 속의 송사리들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던 투명하고 맑은 물이다.

강가에 도착한 꼬맹이들은 맨 먼저 돌멩이부터 던져 본다. 커다란 돌을 던져서 '핑핑!' 하고 단단한 소리가 나야 제대로 얼음이 언 것이다. 이 정도는 시골에 사는 표준 꼬맹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핑핑!' 소리가 나면 꼬맹이들 중 제일 형님이 얼음에 가볍게 한 발을 딛어 본다. 끄떡도 없다. 약한 얼음이라면 '지지직!' 하며 불안한 소리를 내고 발을 딛은 곳부터 하얀 금이 사방으로 나뭇가지처럼 빠르게 달려갈 것이다. "자, 다들 와라." 그러면 나머지 꼬맹이들이 뒤질세라 얼음으로 우르르 올라간다. 얼음 위는 미끄럽고 단단하다. 발로 툭툭! 차서 눈을 털어 내면, 감청색의 물 속이 말끔하게 들여다보이는 단단한 얼음이 속에 조그만 기포를 세로로 담고 있다.

"자 시작하자." 대장 형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꼬맹이들은 가져온 연탄불을 얼음 위에 놓는다. "치이익!" 하고 얼음에 동그란 자국이 생긴다. 또 다른 꼬맹이는 그 틈에도 연탄불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는다. 새빨갛게 언 양 볼은 국광 사과처럼 반짝이고 코끝엔 누런 코가 기차처럼 쏙, 콧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한 쪽에서는 커다란 톱으로 우리가 선 주변의 얼음을 잘라낸다. 아마 사방 7~8미터 정도로 잘라내는 것 같다. 톱날이 오고갈 때마다 새하얀 얼음 가루들이 소롯이 튀어 오른다. "줘봐 나도 해볼래.", "넌 힘없어서 안돼.", "그래도 할래!" 딱! 소리가 나게 꿀밤이 들어오면, 질서는 저절로 잡힌다.

"야 저기 봐라." 강 건너편에도 언제 도착 했는지 윗동네 꼬맹이들이 열심히 얼음을 자르고 있다. 한겨울, 대관령 꼭대기에서부터 새파란 하늘을 그대로 머금고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새하얀 얼음의 세상에는 두 동네의 꼬맹이들이 화선지에 떨어진 까만 먹물 점처럼 강의 양쪽에서 모여든 채, 얼음을 자르고 있다. 얼음이 반쯤 잘라지면, 그땐 이미 식어버린 연탄불을 들어내고 도끼로 구멍을 뚫는다. 거기에 커다란 장대를 꽂고 물밑의 모래바닥에 장대를 찍어 본다.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동그랗게 둘러싼 아이들에게 대장형님이 한 마디 한다. "음 적당하군."

드디어 얼음이 완전히 잘라지면 우리의 얼음 뗏목은 거대한 대양, 아니 강 건너편으로 나간다. 막대기로 바닥을 찍으며 나가는 것이지만, 제법 점잖게 출렁이며 강의 중심으로 다가간다. "와아아!" 이쪽에서 함성이 오르자, 강 건너편의 아이들은 잠시 손길을 멈추고 일제히 다람쥐처럼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다, 갑자기 손길이 빨라진다. 우리 동네 꼬맹이들을 실은 커다란 얼음 뗏목은 거침없이 왜군을 막으러 거북선이 되어 나가가고, 자신들이 왜구가 되어 버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들은 죽을 둥 살 둥 얼음을 자르고 있다.

드디어 강 건너 편의 아이들이 멀리에서 조그맣게 단체로 움찔! 하고 움직인다. 그쪽의 뗏목도 드디어 출항을 한 것이다. 일렁일렁 움직이며 이쪽을 다가온다. 건너편 마을의 아이들 빨갛게 상기된 얼굴들이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인다. 물살을 따라 조금씩 하류로 밀려가며 두 얼음 뗏목은 강 한 가운데서 마주선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리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