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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아이즈]칼럼 '김명기의 목장통신'-나는 꿈을 꾼다

최길시 2021. 10. 22. 07:12
글쓴이 김명기 [홈페이지] 2011-11-29 03:17:55, 조회 : 952

 

 

[뉴시스아이즈]칼럼 '김명기의 목장통신'-나는 꿈을 꾼다
기사등록 일시 [2011-11-28 11:21:25]

http://m.newsis.com/inc/inc_article_view.php?cID=1&ar_id=NISX20111128_0009861947

【서울=뉴시스】말을 타고 늦가을 속으로 나섰다. 특히 겁 많은 말을 훈련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마실 외승을 나가면 인간 세계의 모든 것이 말에게는 두려움 투성이다. 지나는 자동차, 트럭, 경운기, 짖는 개, 펄떡이는 닭, 이상하게 생긴 비닐 덩어리들….
말은 사바에서 단하나 믿을 만한 존재인 내게 의지한다. 적당이가 아니라, 완벽하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것이다. 나를 신뢰하는 말을 타고 샛노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난다.

은행나무 아래 말을 멈추고 이제는 짙은 색으로 변해버린 호수를 바라본다. 강릉이라는 바닷가에서 태어난 나는, 평소에도 물을 무척 좋아해서 좀처럼 물가에 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몇 시간을 흘려보내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늦가을의 물빛에는 당할 재주가 없다. 지금도 가끔 한강변에서 커피를 끓여 마시곤 한다. 한동안 물속에 비친 가을 하늘을 바라보다 이윽고 먼 역사의 시대로 빠져든다.

이제는 아득히 잊혀져버린, 인간과 말의 삶이 공존하던 시절을 돌아본다. 우리가 서식하는 이 땅은 눈앞의 현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득한 선사로부터, 현재를 위해 희생한 선조들과 말의 피가 배인 터전이다. 또 우리만 먹고 살겠다고 온통 공해와 쓰레기 더미로 오염시킬 배설의 장소가 아니라, 소중한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이 자라서,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낳고 자자손손 살아갈 영원의 대지다.

인터넷 게임과 온라인 기술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닌, 땀을 흘리며 꿈을 좆던 젊은이들이 질풍처럼 대지를 말 달리던 곳. 사랑하는 이와 함께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커다란 5월의 느티나무 아래로 천천히 말을 몰아 지나가던 곳이다.

나는 꿈을 꾼다.

이 땅에 다시 말들의 거친 숨결이 넘쳐나고, 언젠가 우리 모두 자신의 말을 가지고 이웃집에 놀러 갈 수도 있다면. 수많은 승마인들이 스스로 자기 집 곁에 아담한 마구간을 짓고, 새로 태어난 망아지가 얼마나 건강한지, 그 심장이 얼마나 쿵쿵 울렸는지, 비틀 비틀 어미의 젖을 찾는 망아지의 생김새에 대해 이웃과 이야기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는 아름다운 밤을 그린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말을 타고 은사시 나무가 숲을 이룬 공원을 거니는 모습, 망아지가 끄는 눈썰매, 그리고 그 썰매를 타고 눈을 맞으며 꽃비처럼 웃는 아이들…. 어른들의 튼튼한 근육에 안긴 아이들이 함께 자신들의 역사와 땅을 돌아보던 시간. 말을 탄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흐뭇한 눈매가 세대를 연결하는, 그 진지한 시간이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고만고만한 또래의 동네 친구들끼리 말 달리기 시합을 하고, 그 중에 지난 봄 새로 탄생한 새로운 종마가 주목되고, 그 말이 언젠가는 정식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게 되는 것이 상식이 되는 시간. 나는 광속도로 돌아가는 현재에 잠시 눈을 감고 그런 시간을 상상한다. 가슴이 뛴다.

귀중한 청소년들의 시간이, 생명보다 빠른 기계를 타고 위험천만한 속도를 즐기는 젊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출처 모를 금전과 인위적인 미모와 허망한 지위를 좆는 맹목적인 과도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천천히 느리게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우리 모두를 배려하는 그런 영원한 삶에 대한 진정한 지혜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게임에 빠져 있다가, TV 드라마에 빠져 있다가, 화면 가득한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청소년들이 아닌, 가난이 지겨워 음습한 고시원에서 고시공부에 매달리던 그런 청소년이 아닌, 라면도 제대로 못 끓이면서 패스트푸드점에서 복잡한 주문만은 척척해내는 그런 젊은이들이 아닌, 그렇게 초현대적인 청소년으로 자라나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대다수 국민을 속이는, 지금까지처럼 불행한 국민들의 이기적인 지도자가 아닌,

말을 타고 우리의 국토를 대장정하여 샅샅이 구경하고, 드넓은 산하의 강에서 친구들과 살찐 물고기를 천렵하여 매운탕을 끓여 먹고, 언젠가 중국과 일본, 또 칭기즈칸의 야망이 얼룩진 키르키즈의 대초원도 돌아보고, 멀리 유럽과 미국의 학생들과도 말을 타고 서로의 역사를 교류하는 기회를 가진, 여유만만하고 너그러운 젊은이들이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모든 일들이 가진 자들이 누리는 일종의 특혜가 아니라, 그저 보통 학생들의 용돈이나 아르바이트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되면 좋겠다.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이 말과 함께 청소년기를 누리는, ‘우아하고 꿈같이 달콤한 로망’이라는 느린 제조과정을 통과하여 완성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젊은이라면 이런 저런 사소한 이유로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배척하고, 무엇이든 일단 속이고 보는, 쓸 데 없는 세력다툼 따위를 벌이지는 않겠지. 넉넉한 마음으로 인류전체를 감싸 안을 그런 배포를 지닐 수 있겠지. 어려운 자와 가난한 자들을, 가슴에서 우러난 뜨거운 눈물로 보살펴 주겠지.

화장을 하지 않아도 여자가 가장 여자다울 수 있고, 헛된 과시를 하지 않아도 남자가 가장 남자다울 수 있는 그런 곳. 그곳이 내 나라의 산천이면 좋겠다. 젊음의 꿈이 영그는 푸른 하늘 아래, 햇살 향기가 잘 밴 바삭바삭한 손수건으로 굵은 땀을 닦는 젊은이들의 얼굴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멋진 모습이 가까운 다음 세대의 문화가 되었으면.

이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두 번 다시 그런 아름답고 안타까운 젊음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그런 건강하고 맑은 미소를 보게 되길 매일 밤 꿈꾼다. 그 현실의 기틀을 내 대에서 만드는 것. 그것이 내게 내려진 진지한 천명(天命)임을 안다.

한국국토대장정기마단 훈련대장 allbaro1@naver.com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54호(12월5일자)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