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시 2021. 10. 20. 09:14
글쓴이 김명기 [홈페이지] 2011-07-12 06:44:50, 조회 : 920

 

 

야간열차.

영천에서 서경주로 갔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경상도 길은, 먹물 같은 어둠입니다. 서경주역 오후 11시 30분. 기차는 없습니다.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아무도 함께할 이 없는 타향에서 혼자 잠들기 싫습니다. 택시를 타고 동대구역에 왔습니다. 8만 6천원. 기사에게 9 만원을 쥐어줍니다.

12시 27분 야간 열차. 무궁화 호를 탑니다. 취객의 욕설이 질펀한, 플랫폼을 떠나 식당 칸에 오릅니다. 한밤의 야간열차. 노란 등불의 식당 칸. 나는 이 고독한 행성의 진정한 오아시스를 기억해냅니다. 캔 맥주 하나에 다시 힘이 납니다. 이빨로 쏘시지 비닐을 벗겨냅니다. 21년 전, 자가용이 없던 젊은 나는 이 열차를 타고 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신탄진행 열차로 기억합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책임지는 법,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법, 인생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법, 흥미 있는 일에 무관심해 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삶이 나를 속여 천둥벌거숭이 거지로 만들어도 죽기 살기 지구에 매달리는 법. 돈 없는 놈에겐 사랑 따위는 없다는 진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인생에게 강요받았습니다. 제일 싫은 일은, 야비한 놈들과 악수 하는 법. 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생떼같은 사랑을 잊는 법.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모순들이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근본일 것이다. 라는 확신은 너무 우울한 것이 되겠지요. 그런 건 우리가 책에서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바다로 가라는 데이터만 입력된 아기 거북이였습니다. 책에는, 온갖 날짐승들이 너희로 만찬을 벌일 것이다. 라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이게 뭐야? 내가 꿈꾸는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그런 절규는 소용 있었나요?

그러니 지금 이 야간열차의 오아시스는 신의 축복입니다. 결코 불평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맥주 캔을 들고 문득 기도합니다. 내가 기억하는 내 벗들이 벨벳처럼 부드러운 꿈을 꾸고, 모진 운명 앞에서도, 범 앞의 하룻강아지처럼 활발한 아침을 맞게 되길 빕니다.

무궁화호 식당 칸 차창, 달캉거리는 진동에 흔들거리는 중년 남자의 기원입니다. 사랑합니다. 믿지 않으셔도 나는 괜찮습니다. 기차는 비현실의 레일을 달립니다. 지금 해운대의 파도가 보입니다.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허구를 밟고 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여기는 왜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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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문마을에서...